내 경우엔 불평등한 현 경제 질서에 대한 반항이었다. 사회를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라놓고, 인간의 존엄성조차 무시하며, 자연을 파괴하고, 뿐만 아니라 정복자들이 노예화시킨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지구사의 온 대륙을 약탈하고 있는 그런 경제 말이다.

대부분의 다른 이들처럼 나 또한 적색을 거쳐 녹색의 길로 들어서게 됐는데, 이는 좌파에 실망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로마시대의 스파르타쿠스 노예 봉기(BC73년)에서 토마스 뮌처의 독일농민 봉기(1525년), 그라쿠스 바뵈프릐 상퀼로트 운동과 프랑스 리용 견직 공장 노동자들의 봉기(1831년), 그리고 파리 코뮌(1871년),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 때의 노동자평의회,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의 게릴라들, 그리고 베트남 민중들의 항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대가 흘러 오도록 면면히 이어져온 그 ‘희망’을 믿었다.

그러나 오랜 전부터 이미 나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드높은 이상은 사회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집단적 소유 사상을 통한 사회주의 깃발 아래에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동과 반동행위를 처단하는 것만으로 이상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사람은 권력을 쥐게 되면 변화보다는 기존 질서에 영합하여 이를 유지하기 마련이 아닐까. 재구성과 혁신, 그리고 혁명 속의 혁명을 보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은, 사회주의는 인간이 머리 속에 갖고 있는 그런 꿈이 현실로 실현된 것이 아니며,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경험되고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 사회는 사회주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지난 세기에 이상적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던 사회, 즉 개인의 자유의지로 결합된 공동체에 살면서 노동분업에서 해방되어 오전에 어부로, 오후엔 장인으로, 저녁에 문학 평론에 전념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 대한 꿈을 나는 물론 계속해서 꿀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경험적 과학이며, 그 점에서 공산주의는 20세기의 비극이었다.

나는 오랜 전부터 이상적인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의 이상을 포기했고, 사회주의의의 영속성(재정립, 재구성 …), 그리고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믿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 확신했던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주의의 영속성, 그리고 중심성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신념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른바 ‘변혁’을 갈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분명 마음속으로 이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좌파’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는데, 이는 일종의 비타협 정신, 즉 변화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면 변절하지 않는다는 고집이 아닐까 한다. 지금처럼 ‘사회주의의 실체’가 드러나고 사회주의의 희망과 다른 희망들 모두가 꺼져 가는 상황에서 그들의 신념에 찬 투쟁의 고결함은 더욱 값진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강직한 의지를 존중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말해서, 젊은 시절의 추억 때문에 정치 활동이나 비판이론의 창출에 나서는 사람은 없다. 마오쩌뚱과 체 게바라 사후에 정치를 알게 된 오늘날 젊은이들은 구소련 브레즈네프의 ‘현실 사회주의’나 미테랑 재임 시절의 사회관리주의 말고는 사회주의의 희망에 대해 알지 못한다.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이것을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부르길 고집하는 것은 옛 동지들과의 모임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중가수 조르주 브라상이 “중요한 건 오랜 친구”라고 노래했던가? 그러나 끼리끼리의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는데도 집단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고집을 피우는 것은 ‘진정한 사회운동’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의 사상적 토대가 된 맑스주의가 왜 더 이상 변혁의 열망을 표출할 수 없는가를 또 다시 설명해야 할까? 이미 많은 책과 잡지에서 이에 대해서만도 여러 차례 상세하게 다뤘다. 하나의 사상틀이자 조직원리이며 강력한 형태의 ‘패러다임’인 맑스주의는 운동의 대상, 주체, 그리고 그 목적을 응축시켜 냈다. 그 운동은 분명히 반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라는 삼위일체였다. 여기에 더하여, 세 요소가 분열 조짐을 보였을 때, 당의 통일성과 국가의 중심성이 이 세 요소의 통일을 보장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이 점이 중대한 실수였다). 또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생산력의 사회화’였다.

우리는 억압의 요인을 한 가지에서 찾는 단순한 논리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실제로 남성 우월주의, 국가주의, 생산지상주의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것만은 아니다. 변혁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일체성(중심성)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새로운 예루살렘’도 믿지 않는다(새로운 예루살렘이란 바빌론의 히브리인들이 바빌론을 벗어나 새로운 예루살렘을 찾아 떠난 것처럼, 노동자들도 고통받고 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벗어나 그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노동운동 노선을 말한다). 절대권력을 지닌 국가도 두려운 대상일 뿐이다. 특히 생산력의 증대는 더더욱 우리를 두렵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잊혀진 좌파의 후손들이다. 스파르타쿠스, 토마스 뮌처, 그라쿠스 바뵈프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그늘진 영광 말고 현재 적색 진영에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의 가치 속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다. 정치에서 이 기치는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한 세상에서 영웅이나 성인에 대한 열광과 믿음이 오히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적색에 대한 찬양을 단념한 지금(만약 아직도 그렇다면, 확신컨대 옛 동지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정치에 끌어들일 것인가? 그 첫 시도는, 이전의 ‘노-자 대결’이라는 중심투쟁과 더불어 ‘제2의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여성주의와 생태주의(삶의 질과 관련된)가 바로 이에 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심 투쟁에 종속되어 있었던 탓에 변혁의 잠재력이 크지 못했다. 1970~80년대로 들어서자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른바 ‘무지개 정치’가 등장했다. 노동자, 여성, 농민, 청년, 동성애자, 생태주의자, 제3세계 민중 등을 모두 역사 주체로 한데 묶은 것이다. 이들은 각자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억압에 맞서 싸우지만, 또한 함께 모여 싸울 필요도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한 발짝 앞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럽의 녹색당 혹은 브라질 노동자당(룰라), 미국의 제시 잭슨 목사의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과 같이 대안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에 숭배했던 성상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했고, 아니면 그것 없이 시작했다. 브라질의 룰라 노동자당의 카스트로주의나 치코 멘데스처럼 부적절한 성상일지라도 갖고 있는 것이 나은 예도 있는 반면에, 독일의 대안세력인 녹색당처럼 가능하면 새로운 성상을 가지려 한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콜라주’는 한계를 갖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각 사회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노동운동은 여성주의적이거나 생태주의적이지 못했다. 이처럼 각각의 사회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러 운동들이 수렴될 수 없었다. 이 같은 수렴이 이뤄지려면 일종의 ‘사회적 생산’, 즉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정치구호가 창출되어야 했다.

나는 정치적 생태주의가 바로 각자의 희망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상의 틀과 패러다임이 될 수 있으며, 녹색 정치가 그 기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녹색당이 기름띠 속에 갇힌 가마우지 새를 걱정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녹색 정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포괄적인 기치들이 모두 모여 있는 우산, 또는 무지개를 잡아내는 장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적 생태주의는 적색과 구조적으로 비교가능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즉 구체적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생산지상주의가 드러내는 ‘현 문제들’을 분석하고 최대한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연대의식, 자율성, 생태관에 입각한 책임의식, 민주주의 같이 억압받는 자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가치체계와 함께, 생태적 발전,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구상도 갖고 있다.

그러나 한편 적색과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투쟁해야 할 적이 한 두 개가 아닌 여러 개이며 구체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적은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주체 자체도 막연하고 복잡할뿐더러 모순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 목표는 혁명의 위대한 문을 통해 도달하는 ‘낙원’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논쟁적인 하나의 길 위에서 전진하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적색에서 멀어지고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하고 싶다. 적색을 변화시키겠다는 허망한 꿈을 좇거나 협소한 적색과 녹색 그룹의 주변에 머무르기 보다는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적색을, 현실적으로는 녹색을 선택해서) 생태주의자들과 함께 사회적, 전 세계적 차원의 노력을 강조하는 녹색 패러다임을 갖고서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진정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