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진보신당 강원도당 홈페이지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주대환의 ‘신노선’이다.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추석을 지나고 와서 들어와 오니 온통 ‘신노선’ 논쟁으로 도배를 했다.

얼마 전 친구와의 술자리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박정희 정권의 성과를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 “한미FTA에 진보진영의 반대근거를 모르겠다”, “과연 한국은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래도 노무현 정부가 잘 하지 않았는가? 이명박 정부를 봐라!” 등등. 아마도 그 친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미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과거 운동권 물을 조금 먹었던 이들에게 금기시 되었던 이러한 이야기를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대환의 ‘신노선’ 제안은 반쯤 성공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환영한다. 나의 주장이 올바른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고 토론해야 한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문제제기도 해볼 만하다. 예를 들어 “한미동맹은 그릇된 것인가?”, “사대주의는 나쁜 것인가?” “오히려 사대주의야말로 동북아 평화를 위한 길이 아닌가?” 등등. 물론 이런 문제제기는 끊임없이 비판받으면서 자신의 ‘사유실험’을 하면서 교정되는 것이다. 한 후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혹독한 지적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주대환-최병천-홍기표 씨의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환영한다.

그러나 이 분들의 이야기에서 약간의 쓸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분들의 이야기, 특히 이 분들의 역사인식이 별로 새롭지 않고 오히려 역사인식에서 과도한 근대화론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쓸쓸한 것은 친구의 이야기이다. 친구는 대학생활 동안 역사공부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하였고, 해방전후사 및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 문제 등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지 않는가? 우리는 주대환씨가 말하는 80년대 운동권의 인식틀, 즉 한국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보는 인식틀을 넘어서지 못했는가? 우리는 역사공부를 하면서 대한민국 정통성에 내재한 한계를 보지 못했는가?

나는 주대환-최병천-홍기표씨의 주장(대한민국 정통성 인식, 해방전후사 인식, 박정희정권 평가,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등)을 검토하면서 과거 친구와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를 떠올려 보고자 한다. 요새 여러 일이 쫓겨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두서 없는 이야기를 몇 차례 올리고자 한다.


한국현대사에 대한 주대환씨의 사민주의적 역사관은 아직 미성숙하다

주대환씨는 NL(맹목적 민족주의)과 PD(혁명적 민주주의)의 기원을 따지면서 해방직후부터 1950년대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평가를 한다. 먼저, 그는 우리나라를 식민지 종속국으로 보는 운동권의 시각을 비판한다. 즉 운동권들은 한국을 미성숙한 자본주의(식민지반봉건체제)또는 부족한 자본주의(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았고 이로부터 자주적 근대국민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한 NLPDR이 나왔다는 것이다.

주대환씨에 따르면, 이러한 운동권적 인식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1950년대 한국은 이미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계급이 소멸하고 평등한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건국된 성숙한 자본주의이자, 세계사에서 뒤떨어졌다고 볼 수 없이 보통선거권을 실시한 현대 민주주의국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승만과 친일파만이 아니라 조봉암과 많은 좌우파들이 참여하여 건국한 나라이기에 그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운동권들만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을 긍정하면서 김일성-박헌영이 아니라 여운형-조봉암에게서 정통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주대환씨는 사민주의에서 길을 찾았기에, 사민주의자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 싶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온건좌파인 여운형과 조봉암을 만났고, 그 속에서 정통성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역사적 재구성에 관심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대환씨의 사민주의적 역사관은 아직 무르익지 못했고(물론 향후 이 작업을 기대하지만), 이렇다 보니 과거 좌파의 역사관(NL 혹은 PD)을 비판하기 위해 근대화론에 기대어 해방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를 ‘낭만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단독정부의 수립과 토지개혁은 수동혁명의 산물이다

주대환씨도 지적하다시피, 한국은 19세기 말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데 실패하였고, 식민지배로 자국적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이 지연되었다. 이 돌파구는 해방 이후 여운형 주도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평, 전농을 중심으로 열렸으나, 이 자주적인 근대국가수립 노력은 미국과 소련의 진주에 의해 좌절되었다. 미국은 극좌파(조선공산당)은 물론 온건좌파(여운형 주도의 건준과 조선인민공화국), 심지어 온건우파(김구, 김규식)조차 부인하였다. 반면 미국은 이승만, 김성수, 송진우 등 극우파세력과 연대하면서 미군정을 수립하였고, 미군정의 핵심 자원은 일본 식민지배 관료였다. 결국 해방이후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은 온건좌파 주도의 인공을 부인한 가운데 식민관료와 극우파(자유당, 한민당)를 복원시키는 과정이었다.

자주적 근대국민국가 수립을 좌절시켰던 미군정과 이승만은 단독정부(분단국가) 수립 방침이 확정된 이후 국민의 동의를 얻고자 토지개혁과 민주제도를 도입하였다. 그것도 온건좌파 거물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발탁해서 말이다. 주대환씨가 강조하듯이 서구에서 토지개혁과 (보통선거권 등) 민주제도의 도입은 오랜 동안의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이지만, 한국은 불과 몇 년 안에 위로부터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대환씨는 단독정부의 수립과 이후 단행된 토지개혁을 근대적 민주국가와 평등한 사회경제적 토대의 수립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주대환씨 말대로, 단독정부의 수립은 건국과 헌정질서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세우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토지개혁은 조선 말부터 줄기차게 진행된 봉건적 지주소작관계를 해소하고 경자유전의 법칙을 실현하는 근대적 경제개혁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제도와 토지개혁이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경제부흥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층 더 의의를 부각시키고 싶을 것이다. 특히 토지개혁은 한국 정치사에서 조봉암을 일시적으로 민중의 대변자로 승격시키는 것이었고, 또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의 민심을 얻은 여당이 전통적으로 농민의 표를 흡수하는 ‘여촌야도’라는 한국사회의 선거풍토를 만드는 계기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토지개혁, 민주제도 도입, 헌정질서의 수립이라는 근대국가의 정통성의 요소들이 극좌파, 온건좌파, 온건우파까지도 폭력적으로 제거한 후에 탄생한 것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최장집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수동혁명의 악순환, 즉 “혁명-복고(반혁명)-제한적 개혁-개혁의 후퇴”의 과정의 첫 시작이었다. 즉 여운형 주도의 건준과 인공의 수립이 자주적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는 혁명의 과정이었다면, 미군정에 의한 온건좌파의 폭력적 진압이 반혁명의 과정이라면, 그 이후 혁명세력 중 일부(예를 들어 조봉암)를 분자적으로 포섭하여 토지개혁을 수행하는 것이 위로부터의 제한적 개혁이었다면,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극단적 폭력과 기존의 제한적 개혁조차 부인하는 ‘개혁의 후퇴’과정이었다(조봉암 사형, 극단적 민생수탈, 선거부정 등).

◀ 한국전쟁은 미국군산복합체의 전략, 대사회주의권을 확장하려는 소련의 전략, 이승만과 김일성의 낭만적 혁명주의의 산물이었다. 한국전쟁의 시작은 책임윤리(자신 행위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원칙)가 가장 결여된 선택이었다. 이 전쟁은 '전국민이 치른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상처'였다. 한국전쟁에서 우리 국민이 치른 희생은 근대 이후 한국의 역사가 지녀온 고통과 비용을 보두 합친 것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전쟁은 전쟁을 발발한 세력들이 통치체제를 안정화시키는 역설을 가져왔다.

PD노선은 일제시대에나 맞는 낡은 노선이 아니라 수동혁명의 산물이다

주대환씨는 대중투쟁과 독자적 세력화를 강조하는 PD노선이 일제 시대에 맞는 노선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나는 이 노선이 한국현대사, 대한민국 정통성의 형성과정에 내재한 수동혁명의 산물이라고 본다.

내가 수동혁명을 문제삼는 첫 번째 이유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의 이념과 그 헌법이 작동하는 현실 간의 극단적인 괴리 문제 때문이다. 물론 어느 나라건 헌법의 이념과 현실간의 괴리를 나타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괴리현상의 폭이 지나치게 크고 반복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나는 PD 노선이 헌법 이념과 현실간의 극단적인 괴리, 즉 초헌법적 쿠데타의 반복과 민주주의의 취약함에서 나타난 산물이었다고 본다. 즉 1980년대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제한적 개혁 이후 나타나는 극단적 폭력과 개혁의 후퇴를 정상적인 선거혁명을 통해서 막을 수 없었고 거리의 대중투쟁을 바탕으로 한 혁명(4.19, 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저지하였고, 이것은 PD 노선이 정상적인 선거혁명보다 대중투쟁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이유이다.

내가 수동혁명을 문제삼는 두 번째 이유는 수동혁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지도적 인물들의 ‘변신주의’이다. 통상 수동혁명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회집단이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보수집단에 흡수되어 진행되는 위로부터의 변화와 개혁을 말한다. 이 경우 개혁의 폭은 상당한 축소된 형태로 진전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국사회에서 수동혁명의 상당부분은 ‘변신주의’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변신주의란 집권 엘리트들은 다수파를 형성하고, 국민의 최소한의 동의를 만들기 위해 과거 혁명기 저항세력이었던 야당의원이나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분자적 혹은 집단적으로 포섭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승만 정권기 조봉암 선생, 박정희 정권기 장준하 선생, 김영삼 정권기 민중당 지도부, 김대중 노무현 정권기 수많은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그러하였다.

변신주의가 일정 수준의 개혁의 성과를 이루는 데 기여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래로부터의 변화와 개혁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명백해다. 왜냐하면 변신주의는 수동혁명을 넘어서서 서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좋은 정당’을 만드는 과정을 지연시켰기 때문이다. 변신주의의 반복은 PD노선이 독자적 세력화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계기이다. 아마도 주대환씨와 노회찬씨 같은 선배들이 1990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자적 포섭에 휘말렸다면, 민주노동당의 탄생은 훨씬 더 지체되었을 것이다.

나는 1990년대 이후 변화된 상황 속에서 PD노선의 낡음을 주창한다면 주대환씨의 논의에 동의하겠지만,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과도하게 왜곡하면서 PD노선을 일제시대에나 맞는 노선으로 취급하는 것은 동의하지 못한다. 한국의 사민주의의 발전경로를 찾기 위해 대한민국의 정통성 인정(주대환씨) 혹은 권력의 원천의 긍정(홍기표) 만큼이나 권력에 내재한 태생적 한계를 역사적으로 인식?평가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구태여 역사를 되짚어 가는 것이다.

우리 헌법으로만 보면, 한국사회는 이미 반 이상은 사민주의 국가이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헌법과 현실간의 괴리 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정질서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내재한 수동혁명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야말로 한국상황에서 사민주의 정치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수동혁명의 역사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대안이 없이 선거혁명과 연합전술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진보적 정치세력이 보수세력에 분자적 혹은 집단적으로 포섭되는 변신주의의 오류를 반복할 수 있다.

(다음에 계속)

작성일 : 2008-09-18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