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천의 인식전환 주장-평화주의적 역사해석의 ‘포기’
최근 최병천씨는 주대환씨의 ‘08년 신노선’을 환영하는 글(비지론-독자론 넘어 ‘연합정치’를)에서 ‘증오의 정치’에 빠진 좌파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인식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안보문제(친미/북한문제)의 역사적·경험적 ‘실재성’이다. 조선일보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때문에 안보상업주의가 먹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민중적 체험’이 있기 때문에 안보상업주의가 작동한다는 <선후관계>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둘째,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성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후발산업화는 많았지만 대한민국처럼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비록 그가 독재자였지만 박정희의 ‘역할’도 있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 이제 ‘팩트’의 영역이 되었다.“(최병천의 글에서)
최병천씨는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저소득, 저학력 서민들은 한국전쟁과 박정희식 경제성장을 ‘체험’했기에 지금도 강력한 <안보-성장동맹>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기에 “민중들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적 논리 중에서 ‘합리적’ 부분을 ‘적극 수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최병천씨의 논리는 체험과 민중의 의식 사이에 작용하는 ‘해석틀’(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최병천씨의 주장대로 하면, 전쟁의 ‘체험’ → 안보반공주의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그러나 전쟁의 ‘체험’ → 적극적 평화주의도 가능할 수 있다. 체험이 안보반공주의로 갈지, 이와는 상반되는 적극적 평화주의로 갈 지는 ‘체험’에 대한 ‘해석틀’(작동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결정된다. 무리하게 도식화하면 ‘체험 → 안보반공 이데올로기 → 안보반공주의’ 또는 ‘체험 → 적극적 평화이데올로기 → 적극적 평화주의’ 양 경로가 가능하다. 결국 체험과정 혹은 체험 이후 과정에서 그 체험을 평가하는 해석틀(이데올로기, 역사교육)가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 우리의 역사교육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적극적 평화이데올로기’가 설 자리가 거의 없었던 반면, ‘안보반공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하였고 그 체험은 안보반공주의로 공고화된 것이다. 조봉암이 집권하여 적극적 평화이데올로기가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에 강하게 작동하였다면, 한국은 일본의 평화헌법보다 강력한 적극적 평화주의가 정착됐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역사인식과 우리의 정체성의 형성 과정은 단순한 ‘체험’을 넘어서서 그 체험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적극적 평화론’의 입장에서의 재해석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신당과 당원의 정체성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오늘의 한반도, 동북아 정세를 인식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기반이 된다. 그런데 최병천의 ‘전쟁 → 안보반공주의’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러한 재평가와 재해석의 과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병천의 오류는 박정희 경제성장에 대한 논의에서도 반복된다.
박정희 시대, 제2차 수동혁명
박정희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에 앞서 잠시 박정희 시대를 제2차 수동혁명, 즉 혁명-반혁명(쿠데타)-부분적 개혁-개혁의 후퇴라는 틀에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이 재구성은 최장집 교수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지난번 글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주대환씨와 최병천씨가 그토록 긍정하자고 하는 한국의 근대국가의 건설은 미국에 의해 성격지워진, 반공주의적 틀 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반공주의라는 것은 좌파는 물론 온건우파까지도 제어한 바탕 위에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극우 보수 양당체제를 정착시키는 과정이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념적 보수성으로 인해 여당의 대안이 아니라 여당이 실패할 때 지지를 끌어들이는 ‘반사적 지지’에 의존하는 정당이었다.
전쟁 이후 이승만정부는 청년단체와 폭력적 준국가기구들로 사회의 하부를 장악하였고, 보수양당을 견제하고 토지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끌어들였던 조봉암마저도 처형하는 등 반공주의의 틀 내에서 형성된 자유민주주의조차 스스로 파괴하는 비민주성,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승만 시대의 말기는 독재 대 민주의 대립구도를 형성하였고, 급기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4.19혁명으로 귀결되었다.
1958년 10월 서울고등법원 재판정에서 열린 진보당사건 재판. 사형 직전 조봉암이 남긴 말은 "내 죄는 정치활동밖에는 없는데…. 마지막 술 한 잔을 달라" 였다.
그러나 4.19혁명을 기반으로 등장한 민주당 정부의 사회개혁정책은 학생-중산층을 주도로 제기된 4월혁명의 요구, 즉 민주주의와 자립경제 달성이라는 요구에 현저히 미달하는 것이었다. 결국 민주당과 학생-중산층(이후 재야)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의 개혁정책이 만약 학생-중산층 요구가 수용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면, 그것은 수동혁명이 아니라 능동혁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1961년 군부쿠데타가 발발하였다. 신군부는 4월혁명의 요구, 민주화와 자립경제 달성을 의제로 내걸었고, 4월혁명을 주도하였던 세력의 상당수가 5월 쿠데타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합헌정부를 반민주적으로 붕괴시킨 태생적 한계를 가진 신군부는 63년 대선과 총선으로 집권하였고, 장준하 선생을 포함한 4.19세대의 중요 인사들을 공화당 혹은 정부 기구에 분자적으로 포섭하여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자립경제 달성이라는 이 근대화 프로젝트는 4.19세대의 분자적 변신주의를 촉진하는 것이자 4월혁명의 요구를 담은 부분적 개혁의 과정이었다. 바로 이 근대화 프로젝트를 통한 경제성장의 수혜자인 재벌과 중산층, 고용기회를 얻은 노동자, 새마을운동을 통해 동원된 농민을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성장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를 거치면서 성장동맹의 균열이 나타났고, 박정희의 ‘정권재창출’을 위한 야망은 기존에 존재한 최소한의 자유민주주의 틀조차 배제하는 ‘유신체제’라는 폭압적 체제로 변모하였고, 이것은 결국 박정희 체제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정희 체제는 4월혁명을 통해 탄생한 합헌정부를 ‘반혁명’으로 붕괴시키고, 4월혁명 세력의 일부를 분자적으로 포섭하여 부분적 개혁, 특히 최병천이 그토록 인정하자는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지만, 그 개혁의 의미마저도 퇴색해버릴 후퇴의 과정, 유신체제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최병천식 박정희 긍정론은 조봉암 부정론이다
박정희 체제는 ‘압축성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짧은 시기에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전후의 분단체제는 북한의 속도전에 대항하는 남한의 ‘총화단결’을 가능케 하였고, 냉전의 산물인 한미일 삼각동맹체제 또한 경제성장의 요소였을 것이다. 나아가 재벌총수마저도 무릅을 꿇게 하면서 추진했던 부정부패와 지하경제 척결, 초헌법적 권위를 바탕으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관료제의 효율적 운영과 자원동원능력은 최병천씨가 그토록 인정하고 싶어하는 ‘박정희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최병천씨가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더 인정하고 싶은 것은 당시의 정황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권위주의 체제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독 좌파들이 인정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당시의 정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우선시하는 좌파는 경제성장의 의미를 격하할 것이고,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우파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격하할 것이다. 최병천씨는 경제성장(우파) 대 민주주의(좌파)라는 일면을 강조하는, 절반의 진리만을 강요하는 ‘증오의 정치학’을 끝장내면서 양자의 논리를 함께 수용하는 포용력 있는 정치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결국 이 상황에서 각국의 비교사를 끌어들이며 최병천은 경제성장을 위해 권위주의 체제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로 귀결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최병천씨가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민주주의라는 일면의 가치 속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을 격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당시 ‘권위주의와 경제성장’의 병행이라는 선택지가 불가피했다라는 주장을 전개하기 전에 다른 선택지, 즉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병행이라는 선택지가 가능하였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병천씨가 열심히 살펴 보았듯이, 자원부존 여건이 취약한 후발산업화 국가 중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대부분의 사례는 ‘권위주의 체제’였다. 당시 배고픔과 굶주림, 경제위기가 심각하였던 정황에서 근대화와 경제성장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과정이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치르고 다른 나라에 비해 대단히 짧은 시기에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선까지 이러한 긍정적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 좀 더 숙고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먼저, 한발 물러서서 보자면, 1960년대 초반 자원부존 여건이 취약한 상황에서 최병천씨의 평가가 합당할지 모르지만, 1970년대 산업화가 도약을 시작한 안정기, 중화학공업화로의 전환 시기 유신체제라는 권위주의 체제의 강화로 이어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 시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병행발전의 가능성이 높은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부분이 내가 박정희 정부를 긍정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최병천씨가 민주주의, 복지, 경제성장의 병행발전을 강조하는 사민주의자라면, 이 정도 평가는 내려야 한다고 본다. 이 부분은 비교사적 분석을 통해서도 충분히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최병천씨는 경제발전과 정치체제라는 각 국가별 비교사를 끌어들이더라도 박정희 전반기와 후반기를 나누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끌어들이더라도 적어도 박정희 후반기 긍정론은 인정하기 어렵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5.16쿠데타 47년째를 맞는 16일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에서 열린 '5.16민족상'시상식에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나란히 참석했다. ⓒ연합뉴스
좀 더 적극적으로 강한 질문을 제기하자면, 1960년대 부존자원이 취약한 경제발전의 초창기인 박정희 전반기에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 병행할 수 없었을까? 아직 나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여전히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평가할 때 제기해야 할 중요한 문제제기이다. 이미 쿠데타 이전 장면 정부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합헌정부에 의한 경제성장의 경로가 가능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좀 더 나아가, 엉뚱한 문제제기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조봉암의 사형에 처하지 않고 진보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1960년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권위주의 체제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지나치게 강하게 긍정해 버리면, 즉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병행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면, 조봉암은 민주주의를 잘 제도화할 수 있지만 경제성장을 제대로 촉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조봉암도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강한 권위주의로 경제성장에 올인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과도한 박정희 긍정론은 조봉암 부정론,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온건좌파의 정치의 역사적 부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주대환씨, 최병천씨 우파의 정체성에 빠지지 않길...
물론 최병천이 주장하듯, 역사에 대한 분석은 철저하게 ‘팩트’를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팩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주대환, 최병천씨가 애써 한국현대사를 사민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하려고 한다면,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 많다. 왜냐하면 역사의 해석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오늘 날에도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우파가 역사해석과 이 해석의 전파 과정에서 좌파보다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조봉암의 후예가 정치의 장에 서기 위해서는 ‘적극적 평화론’과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틀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온건좌파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서는 아쉽게도 주대환씨와 최병천씨의 취약한 역사해석은 온건좌파, 즉 사민주의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보다는 우파의 정체성에 빠져 가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에 계속)
작성일 : 2008-09-3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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