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에 계간지 『황해문화』72호에 후쿠시마 원전에 대한 글을 기고했었다. 나로써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관련된 다각적인 문제를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짧은 글 속에 포괄적으로 녹여내려 최선을 다 했다. 이 글을 쓴지 곧 2년이 된다. 당시 상황과 달라진 내용도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후쿠시마 원전 소장으로 현장을 진두 지휘했었던 요시다(吉田) 소장이 얼마 전에 타계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전 사고 직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이 글도 생각이 났다. 여기에 요시다 소장에 대해서도 썼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의 몇달 동안, 참으로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 도쿄를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머무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는 길을 택했다. 이 글에는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는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아마 앞으로도 다시는 이런 종류의 글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개인에게 있어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글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개인적인 사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쓴 글이기도 하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 단락에 있는 “우리가 행한 사실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라는 말이다. 사고 전에도 막연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사고 후 많은 정보들을 수집해 구체적으로 알아가게 되면서 이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뿐만아니라, 때로는 얄팍한 지식이 오히려 무지보다 해가 되기도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앞에 마주 선 일본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 안 천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인 글이고자 한다. 왜 이렇게 큰 원전 사고가 났는지, 막을 방법은 없었는지, 일본의 대응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일본은 어디를 향해 가려고 하는지. 이를 확인해 가는 과정은 자연스레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사고의 개요
1) 사고 경과[1]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되던 대지진 당일부터 1, 2, 3, 4호기 폭발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3월11일 14시 46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가동 중이었던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이후 ‘후쿠시마 원전’으로 표기) 1, 2, 3호기의 연료봉이 노심에 삽입됐고 발전은 정지됐다. 긴급 상황에 따른 자동 대응이었다. 약 45분 후 쓰나미가 원전을 덮쳤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포함한 모든 외부전력이 상실됐다. 설계상 1호기는 전원 공급없이도 8시간(IC:격리시 복수기), 2・3호기는 30시간 이상(RCIC:격리시 냉각계) 냉각이 유지될 터였다.[2] 하지만 나중에 도쿄전력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는 지진 후 5시간만인 19시 반에 1호기의 연료 손상이 시작됐고, 21시에는 연료가 녹는 온도인 2800도에 다다랐으며, 다음날 새벽 6시에 녹은 연료가 원자로 압력용기 바닥에 고여, 압력 용기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보인다. 지진 후 16시간만의 멜트다운이었다.
11일 17시 반에 도쿄전력으로부터 -원자력 안전・보안원(이후 ‘보안원’으로 표기)을 경유해- 냉각계통의 전력상실을 보고받은 일본 내각부는 19시 3분 ‘원자력 긴급사태’를 선언, 21시반에는 원전 반경 3km이내 주민의 피난과 10km이내 주민의 옥내 대피 지시를 내린다. 도쿄에 사는 필자를 비롯해 일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진과 쓰나미 피해만으로도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원자력 긴급사태 선언’이 그 후에 겪게 되는 커다란 재앙의 시작을 의미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도쿄만 해도 당일 교통망의 마비로 많은 사람들이 귀가를 포기해야 했다.
이때 도쿄전력은 외부전력 회복을 위한 전원차량 확보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생각하고 이동가능한 모든 전원차량에게 후쿠시마 원전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지만, 지진으로 인한 도로 피해 및 심각한 교통체증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도쿄전력으로부터 “전원이 있으면 냉각 기능 복구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정부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 또한 “전원차량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도록” 지시를 내린다. 22시, 드디어 전원차량이 1호기와 연결됐다. 하지만 전원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1호기의 전기계통 자체가 고장났음이 판명된다. 후쿠야마(福山) 관방 부장관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당시 전원 확보 이외의 대책은 생각조차 안하고 있었다”. 뚜렷한 대응책이 없는 전대미문의 상황에 내몰리고 있었다. 22시면 이미 연료가 녹기 시작했을 시간이다.
원자로 냉각을 위해 격납 용기에 물을 넣으려 해도 내부 압력이 너무 높아 들어가지 않았다. 압력을 낮추기 위해서는 방사성 물질의 방출을 각오하고 배기 작업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12일 0시경 도쿄전력은 원전 역사상 최초의 배기 작업 실시를 결단하고, 정부는 바로 실행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정작 배기 작업 단계에 들어서니, 비상시 배기 작업 매뉴얼에는 전동식 배기 방법만 적혀 있었다. 전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 매뉴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누구도 수동 배기 방법을 몰라 현장에서는 설계도를 펴놓고 어떻게 하면 수동 배기 작업이 가능한지 검토하는 실정이었다. 한편으로는, 배기 작업 밖에 해결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후 져야 될 배상 책임이 두려워 도쿄전력 상층부가 실시를 늦춘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지시를 내려도 좀처럼 배기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자, 초조해진 정부는 6시50분 도쿄전력에 -법적 강제력을 동반하는- 배기 작업 명령을 내리고 총리가 직접 후쿠시마 원전을 시찰했다. 10시부터 배기 작업에 들어가 14시 반에 성공한 듯 했으나 15시36분, 1호기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나고 만다. 총리와 함께 원전을 시찰했던 마다라메(班目) 원자력 안전 위원회(앞에 나온 보안원과는 다른 조직. 이후 ‘안전위’로 표기) 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수소폭발이 일어날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당시 수소 폭발을 예상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폭발 사실은 2시간이 지나서야 발표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방사성 물질 확산 분포를 예측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주민 대피가 지연됐을 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대피해야 할지에 대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후쿠야마 부장관에 따르면 “각기 다른 정보들이 한데 뒤섞여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에 정부 안에 있는 사람들도 어느 것이 정확한 정보인지 판단내릴 수 없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 정부의 미흡한 정보 공개는 계속해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도쿄전력・안전위・보안원 그 어느 곳도 총리를 비롯한 정부 각료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얘기해 주지 않았고, 총리는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게 된다. 13일 오전, 총리 관저에 소집된 외부 전문가들은 3호기도 폭발할 것이며,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오후부터 도쿄전력은 3호기에 바닷물 주입을 실시하지만 다음 날인 14일 11시에 3호기도 폭발, 11명이 부상을 입는다. 13시 반에는 2호기도 냉각 기능을 상실, 후쿠시마 원전의 요시다(吉田) 소장은 현장에서 일해 오던 전직원들에게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 노력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다. 여러분이 이곳을 떠나는 걸 막지는 않겠다.”는 메세지를 전한다. 200명이 원전을 뒤로 했고 70명이 남았다.
그날 밤 도쿄전력은 다섯번에 걸쳐 정부에 “현장에서 모두 철수했으면 한다”고 요청하나 정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15일 새벽, 총리가 직접 도쿄전력 본사를 방문해 “사태를 이대로 방치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을 것이다. 도쿄전력이 망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라고 꾸짖고, 이날 오전 정부와 도쿄전력의 통합대책본부가 설치된다. 한편 같은 날 4호기와 2호기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전원을 상실한 원전을 상대로 한 정부와 도쿄전력의 대응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3월 15일과 21일,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에 가장 많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반경 30km 이내 옥내 대피 명령이 내려진 것은 15일, 도쿄의 수돗물에서 -유아용 식수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잠정 기준치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검출된 것은 22일이다.
2) 피해 현황
6월 6일의 보안원 발표에 따르면 3.11 이후 대기 중에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은 77경 베크렐로 추정된다. 520경 베크렐로 추정되는 체르노빌의 1/7이지만 바다로 방출된 양은 제외된 숫자이기 때문에 실제로 환경에 방출된 양은 이보다 많을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새어나간 고농도 오염수가 지하 수맥까지 다다랐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4월22일, 반경 20km 이내 지역을 강제 피난이 실시되는 ‘경계 구역’으로, 30km 까지를 자발적 피난을 권유하는 ‘긴급시 피난 준비 구역’으로 지정했다. 30km 바깥이라 하더라도 방사선량이 법정 기준(연간 20밀리 시버트)을 초과하는 지역 또한 ‘계획적 피난 구역’으로 지정돼 강제 피난 명령이 내려졌다.
방사선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아직 없다. 하지만, 6월말까지 자살한 152명의 지진・원전 재해민 중 후쿠시마 낙농업자・농민은 68명으로, 이들은 방사성 물질 확산이 낳은 피해자들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사고 처리에 몇십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삶의 터전과 자산을 한순간에 잃고, 낯선 땅에서 불안한 장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데는 가늠하기 힘든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현재 8만명 이상이 그러한 고통 속에서 원전으로 인한 피난 생활을 감내하고 있다.
피폭량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되는 것은 우선 현장 노동자들이다. 평상시 원전 관련 노동자들의 허용 피폭치는 연간 20밀리 시버트, 긴급시는 100밀리 시버트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에 이 기준을 적용할 경우 대응 작업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원전에 한해 허용 피폭치는 250밀리 시버트로 변경되었다. 작업 초반에 피폭치 관리가 허술했던데다 내부 피폭을 측정하는 기기가 없었던 탓에 250밀리 시버트 이상 피폭된 노동자가 7명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 중에는 500밀리 이상인 노동자도 있다. 짧은 시간에 500밀리 이상 피폭할 경우 일시적으로 백혈구 수치의 저하가 관찰된다고 한다. 200밀리 이하의 피폭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과학적으로 미지의 영역으로, 노동자들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하며 작업에 임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는 성인의 경우, 연간 100밀리 시버트 피폭으로 발암율이 0.5%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 노동자들 다음으로 방사선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은 아이들이다. 안전위가 원전 주변에 살던 아이들 천명의 갑상선을 검사한 결과, 45%가 내부 피폭된 것으로 드러났다. 안전위는 “정밀 검사를 필요로 하는 레벨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피난 구역 바깥도 불안하다. 원전에서 약 60km 떨어져 있는 후쿠시마시(인구 약 30만 명으로 후쿠시마현의 현청소재지)의 방사선 수치는 사고 후, 지역에 따라 자연 피폭치의 두배에서 열배까지 뛰어 오른 상태다. 후쿠시마시 학부모 단체가 아동 10명의 소변을 채취해 프랑스의 연구기관에 검사를 의뢰한 결과, 모든 소변에서 소량이나마 방사성 물질 세슘이 검출돼 10명 전원이 내부 피폭됐음을 시사하고 있다.1950~60년대, 미국과 소련 등이 대기권 내에서 핵폭발 실험을 했을 때 전세계 사람들이 섭취했던 방사성 물질의 평균량보다 적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사고가 없었다면 노출되지 않았을 위험에 노출되고 만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부는 건강에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부모들의 걱정은 불식되지 않고 있다. 학교의 옥외 활동 제한 기준을 연간 20밀리 시버트로 정한 것 등 – 정부의 대응에 반발해 4월 30일 내각 관방 참여(内閣官房参与)직을 사임한 고사코(小佐古) 도쿄대 교수에 따르면, 정부는 학생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라기 보다는 “기준치를 넘는 학교가 17개 학교 이하가 되도록” 20밀리로 정했고, 그 배후에는 정부가 예산안의 국회 승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이 있다고 한다.[3]
상황이 이러하기에 피난 구역이 아닌 지역의 주민 중에는 방사성 물질의 영향을 우려해 다른 곳으로 피난하길 희망하는 사람도 많다. 경제적 여력이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피난 결정을 내리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직장을 포기하면서까지 피난을 결단하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원전 인근 지역이 아니더라도 방사선 피해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음식을 통해 방사성 물질을 섭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전이 있는 후쿠시마는 수도권에 가까우면서도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인근 지역에서 재배된 농산물이 수도권 식탁에 올라온다. 말하자면 수도권에 음식물을 공급하는 지역인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규제치를 정해 오염된 농수산물의 유통을 막으려 애쓰고 있지만 측정기기 부족 등으로 인해 전수 정밀 검사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7월 9일에도 1차 검사를 통과해 도쿄 도매시장에 출하된 후쿠시마현산 쇠고기에서 규제치 이상의 세슘이 검출됐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35개국이 일본 농수산품 수입 제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위험성은 훨씬 낮지만 해양 오염도 간과할 수 없다. 방사성 물질은 먹이사슬을 통해 생물 농축이 일어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세슘의 경우 생물 농축은 먹이사슬 5단계에서 농축 계수 150정도로, 생물 농축이 문제가 되는 PCB, DDT의 1만~10만배에 비해 미약한 농축이지만 생선 소비자들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외에 주변 관광 산업 등이 괴멸 상태에 빠져 도산하는 회사가 속출하는 등 경제적 피해도 어마어마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생략토록 한다.
2. 왜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
1) 의사 결정의 지연 – 일본 특유의 의사 결정 구조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대응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의 느려 터진 대처와 신비로울 정도로 소극적인 정보 공개는 사고 그 자체와 더불어 일본이라는 나라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일례로 러시아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보자.
러시아의 후쿠시마 원전 대책 본부장으로 임명된 블라디미르 아스모로프는 열물리학 전문가로, 1986년 체르노빌 사고 때 현지 대책 본부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 측의 노우하우가 담긴 조언과 제안을 갖고 일본을 방문하려 했으나 일본의 입국허가가 내리지 않아 출발이 늦어졌으며, 방일기간 3일 동안 도쿄전력 책임자와 접촉하지도 못했다. 그가 제일 먼저 문제시한 것은 일본 관료 시스템의 느린 의사결정이었다.
“일본의 복잡하고 경직된 관료 시스템 때문에 사고 대응이 늦어졌다. 문제를 검토하는 장소가 현장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정책 결정은 늦어지고 상황은 악화된다. 러시아라면 5분만에 결정될 일이 일본에서는 먼저 위원회를 구성해야 했다. 원자로는 계속해서 물을 달라고 3일 동안 울고 있었는데, 일본 특유의 관료적 시스템 안에서 의사결정은 미뤄졌고, 결국 원전은 불타고 말았다.” 아스모로프씨가 체르노빌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정부의 의사 결정 통로를 일원화해서 최대한 빨리 현지 근처에 대책 본부를 설치해 그곳에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기에 대처하는 전문가 그룹이 재빨리 대응책을 제안해서 정치가는 이 전문가 그룹의 요구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제안하는 팀과 실행하는 팀이 될 수 있는 한 현장 근처에 있어야 한다. 내 인상으로는, 일본은 현장과 본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4]
정부와 도쿄전력이 통합 대책 본부를 설치한 것은 사고로부터 4일이 지난, 마지막 수소 폭발이 있었던 3월 15일이었다. 아스모로프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유형의 비판은 일본에서도 논해지고 있어, 관료를 비롯한 일본 엘리트의 의사 결정이 늦은 이유를 우치다 다쓰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정답’을 모르는 단계에서 자주적인 판단과 책임 하에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는 것을 싫어 한다. 이는 수험 엘리트의 폐해이다. 그들은 ‘정답’을 쓰는 방법에 대해 집중적인 훈련을 받아왔다. 따라서 정답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오답이 두려운 나머지 ‘윗 사람’이 정답을 지시해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다. 이들은 결단을 내릴 때 ‘윗 사람의 보증’, 혹은 ‘논거’를 필요로 한다. 자신이 내리는 결단의 근거를 ‘자기 바깥’에서 찾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결단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반론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원한다. ‘논거와 변명거리’가 마련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일본 엘리트의 본질적인 성격이다.[5]
사실, 일본 조직 특유의 신중한 의사 결정 과정은 60여년 전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패전 전의 일본 통치 체제를 ‘무책임의 체계’라는 용어로 설명했을 때부터 반복해서 지적돼 온 사실이다. 정보 공개에 소극적인 이유도 같은 메커니즘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미 한국에서도 이러한 지적은 되풀이 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런 측면에서의 설명은 이상으로 하고, 조금 다른 측면을 지적하고자 한다.
2) 정치적 리더쉽의 부족 – 정치 제도 설계 상의 문제
일본 정부의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점 중 하나로 총리의 리더쉽 부재나 여당의 문제 해결 능력 부재가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대부분 총리 개인의 자질, 혹은 민주당의 수권능력과 같은 정황적 요소에 기인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는데, 만약 총리가 다른 사람이었고 민주당이 아닌 자민당이 여당이었다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까? 근래 4년 동안 총리가 네 번이나 바뀐 사실을감안했을 때, 어쩌면 현재 일본의 총리라는 직위 자체, 나아가 일본의 정치 제도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의문에 설득력있는 답을 주고 있는 학자가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는 사이토 준(斉藤淳 @junsaito0529) 교수와 야마구치 현립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아사바 유키(浅羽祐樹 @YukiAsaba) 교수다. 두 학자가 4월에서 5월에 걸쳐 트위터에서 나눈 대화에 따르면 일본처럼 총리에게 권한을 제한적으로 부여하는 ‘의원내각제’와, 중의원과 참의원의 두 의회가 운영되면서 -비록 차별화는 돼 있어도- 양쪽 모두에 강력한 권한이 부여된 ‘양원제’가 결합된 형태의 통치 구조는 이론적으로 ‘통치 불능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항존한다. 양쪽 국회 중 어느 한 곳이라도 여소야대 상황에 처하면 내각의 정책 결정 폭이 너무 좁아져 정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아사바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1955년에 있었던 자유당과 민주당의 통합, 즉 중의원과 참의원을 아우른 거대 여당인 자민당의 탄생이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자민당이 거대 여당의 지위를 상실하면서 일본 정치는 다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현재의 민주당 정권 또한 중의원에서는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참의원은 여소야대 상황이기 때문에 정책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사임했던 고사코 교수가 “정부는 예산안의 국회 승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것은 제도 설계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 방법은 헌법 개정 밖에 없다. 하지만 해방 후 헌법이 아홉번 개정된 한국과 달리, 패전 후 헌법을 한번도 개정한 적이 없는 일본은 얼마 전까지 헌법 개정의 구체적인 절차조차 법제화 돼 있지 않았다. 나아가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헌법 개정이라는 말은 전쟁 포기 조항인 제9조를 둘러싼 논쟁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기 때문에 일본 사회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결국 당분간은 제도적 결함 속에서 정치가 운영될 것이므로, 두 학자의 주장이 맞다면 중의원과 참의원을 아우르는 거대 여당이 등장할 때까지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일본 헌법 탄생에는 -그 초안을 마련하는 등- 당시 GHQ(미군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는데, 정부의 리더쉽 발휘를 어렵게 하는 제도 설계가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덧붙이자면 한국의 경우 4.19가 낳은 제2공화국이 바로 ‘의원 내각제 + 양원제’였고, 당시의 한국 또한 정국 혼란이 계속되어 박정희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
3) 제 기능을 못한 관련 부서
앞서 논한 사고 경과를 보면 원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관여했던 조직이 소유회사인 도쿄전력 외에 보안원, 안전위 등 적어도 두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조직인 보안원과 안전위는 초동 대응 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전원차량이나 배기 작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 과정을 보면 도쿄전력이 대책 제안을 하고 총리가 이를 추인하는 패턴을 확인할 수 있는 반면, 보안원과 안전위가 구체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거나 해결 방안을 강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산업성 산하에 있는 보안원은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전국 54개 원전에 직원을 상주시키고 있는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그곳에 상주하고 있던 직원 7명 전원이 현지 본부와 함께 현장에서 60km 떨어진 후쿠시마 현청으로 이동(피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현장에 요원을 증파해도 모자랄 판에 사고 당일 현장에 있었던 보안원 직원, 즉 정부 요원은 전원 현장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현장에서 정부 요원이 철수했으니 정부는 도쿄전력이 파악한 정보와 대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정부 조직이 안전위이다. 안전위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안전성 확보를 위한 규제 설정 및 사고 방지책을 담당하는 곳인데, 1990년 “원전이 모든 전원을 상실했을 경우, 송전선의 복구 혹은 비상용 전기 공급 설비 가동을 통해 전원을 회복할 수 있으므로, 장시간에 걸친 전원 상실 상황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는 방침을 세워, 이번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3월12일, 후쿠시마 원전으로 향하는 헬기 안에서 안전위의 마다라메 위원장은 총리에게 “원전은 괜찮습니다. 구조 상 폭발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으나 그날 오후 1호기 폭발이 일어난다. 안전위 또한 긴급 사태에 속수무책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약의 경우에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일본 원자력 연구소가 운용하고 있는 ‘긴급 상황 시 신속 방사능 영향 예측 네트워크 시스템(SPEEDI)’의 예측 결과도 발표를 하지 않아 신속한 피난 계획 수립을 어렵게 했다. 이는 원자력 관련 시설에서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됐을 경우, 지형・풍향・풍속 등을 감안해 그 확산 현황을 신속히 예측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했을 때도 발표됐던 SPEEDI의 예측이, 자국의 원전이 폭발해 주변 주민들의 건강이 위협받게 됐는데도 발표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후에 안전위 위원장은 “원자로 데이터가 부족해 정확한 예측 결과라고 보기 어려웠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었다.”, “발표하면 오히려 사회적 혼란을 낳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등의 해명을 했는데, SPEEDI의 예측은 상당히 정확해 만약 발표했었다면 지자체 등이 피난 대책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초반에 중요한 많은 정보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 배후에는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원전에서 일어난 초대형 사고가 일본 사회 전체의 공황상태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로 인해 정부 발표에 대한 신뢰가 결정적으로 실추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 정부는 큰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원인을 일본 사회의 특수성에 환원시키는 담론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일본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논리는 의사 결정의 지연과 정보 공개의 소극성 등을 설명하는데 있어 일정한 의의를 지니는 한편, ‘그런 일본 사회의 문제점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것이지 우리는 괜찮아’라는 그릇된 인식을 초래할 여지가 있다. 맨 앞에서 정리했던 사고 경과를 돌이켜 보면, 의사 결정이나 정보 관리 이전에 원전 안전 정책 차원에서 구조적인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원전 정책 또한 이러한 구조적 결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반면교사로 삼을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3. 원전 산업의 구조적 문제점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예견된 ‘인재’였다. 지진을 견뎌낼 수 있는 안전한 지침을 만드는 과정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 내진 설계 지침 작성 작업에 관여했던 전문가의 말이다.
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일본의 내진공학을 근본적으로 재성찰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2001년7월부터 ‘발전용 원자로 시설에 관한 내진설계 심사 지침(1981년 안전위 결정)’ 개정작업이 시작되었으며 2006년 9월에 새 지침이 결정됐다. 나도 2001년 12월부터 내진 지침 검토 분과회 위원이 되었으나, 결국 기존 원전이 하나도 불합격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 지침이 만들어져 새 지침을 결정하는 날 사의를 표명했다.[6]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시작됐을 때 도쿄전력은 이렇게 큰 쓰나미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자연 재해라는 인상을 남기려 애썼다. 하지만 도쿄전력이 5월에 발표한 사고 기록 데이터에 따르면 쓰나미가 도달하기 전인 3월 11일 15시 29분, 1호기에서 1.5km 떨어진 방사선 측정기에서 경보가 울렸었다. 측정기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40년 전에 미국의 GE사가 만든 1호기는 쓰나미와 상관없이 지진으로만 방사성 물질이 누출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안전위의 기준 자체가 잘못돼 있음을, 아니면 보안원과 도쿄전력의 안전 검증 작업이 허술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번 사고가 ‘인재’임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2010년에는 일본 공산당의 요시이(吉井) 중의원이 경제산업 위원회에서 “내부 전력과 외부 전력을 모두 상실해 냉각장치가 정지했을 경우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했었다. 이번 사태가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군소정당 소속 의원의 지적에 대해 성의있는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사고 당일, 정부와 도쿄전력은 외부 전원 복구에만 매달려 귀중한 초동 대응 시간을 허비했으며, 원전이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투입할 수 있는 긴급 전문 대응 팀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지진대국인 일본에서조차 원전이 치명적인 위기 상태에 빠질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처음부터 배제돼 있었던 것이다.
1) 추진 기관과 감시 기관의 동거 – ‘원자력 마을’이라는 시스템
원전 사고 후 요사노(与謝野) 경제 재정 정책 담당 장관은 “지진은 운명이니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원자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일본 경단련(한국에서의 전경련) 요네쿠라(米倉) 회장은 “천년에 한번 일어나는 쓰나미에 버틴 것은 대단한 것이다. 원자력 행정은 더 가슴을 펴라.”며 원전 추진 관료들을 격려했다. 이런 발언들의 배경에는 ‘원자력 마을(原子力村)’이라 불리는 원전 추진 시스템이 존재한다.
일본에는 ①여야를 아우른 정치권, ②경제산업성을 축으로 한 관료, ③전력회사와 원전 건설 회사를 중심으로 한 경제계, ④원전 산업 관련 기업으로부터 광고비를 받는 언론, ⑤원자력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학계 등이 결탁한, 거대한 ‘원자력 이권 네트워크’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원자력 마을’이라 부른다.
‘원자력 마을’에게 원전 정책 추진과 자신들의 이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너무 높은 안전 기준은 원전 정책 추진을 어렵게 만든다. 나아가 원자력 에너지를 연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이용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지 그 위험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추진 및 안전 관리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용을 우선시 하게 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원전 추진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경제산업성 산하에, 원전을 감시하는 부서인 보안원이 소속돼 있는 이상한 현실이다. 추진과 감시를 같은 조직이 맡고 있으니 엄격한 감시는 기대하기 어렵다(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놀랍게도 NPO법인 환경 에너지 정책 연구소의 이이다(飯田) 소장에 따르면, 안전 관련 보고서는 실질적으로 원전 건설 회사가 작성한다.
당사자 입장에서 원전 안전 심사 현장에 몇 번이나 갔었는데, 애초부터 전력회사나 원자력 안전・보안원에는 원자력 발전소의 실질적인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실제로 안전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고 있는 것은 설계・건설을 담당하는 도시바・히타치・미쓰비시이며, 도쿄전력은 그들이 작성한 문서의 표지를 ‘도쿄전력’이라고 바꿔달 뿐이다. 이 문서를 원자력 안전・보안원에 제출하는데, 보안원은 관료 그 자체이다. 즉 ‘도쿄전력 문체’를 ‘관료 문체’로 바꾸는 정도의 작업만 할 뿐이다.[7]
이이다는 보안원 뿐만 아니라 안전위 또한 실제로는 행정 관료와 어용 학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원자력 산업의 번영이 일차적인 지향점이었던‘원자력 마을’ 사람들은, 안전에 대해서는 ‘설마 큰 사고가 나겠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8]
특히 전력회사는 안이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사고 후 신속한 대응에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시설 내부의 높은 방사선량이었다. 아톰, 마징가, 건담의 나라 일본에 원전 사고 때 활약할 수 있는 로봇이 왜 없었을까? 실은 1999년에 일어났던 도카이무라(東海村) 임계 사고[9] 이후, 정부는 방사선량이 높은 환경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로봇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2001년에 원격조정 로봇 6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력회사는 사람이 작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일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로봇의 현장 배치를 희망하지 않았고, 결국 2006년 이들 로봇에 대해 폐기 처분이 내려졌다.[10]
일본 ‘원자력 마을’의 유착은 만에 하나의 사태를 상정하는 것 자체를 구조적으로 배제해 왔고, 따라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교과서를 통해 ‘원전은 안전하다’는 인식을 유포시켰고, 원전의 위험성은 제대로 알리려 하지 않았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원자력 산업의 이해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전의 역사는 정보 은폐와 데이터 조작의 역사로 점철돼 있다.[11]
무서운 것은 우리나라도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과연 지진이 없다고 안심해도 되는 것인지, 안전 지침은 적절하게 작성돼 있고 실제 점검도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감시 기관이 원전 산업과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 후쿠시마는 이러한 자문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2) 핵연료 사이클과 핵 폐기물
만약 현재 건설된, 그리고 앞으로 건설될 원전의 안전한 가동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들이 여전히 남는다. 그 중 하나는 모든 원전 소유국의 골치거리인 핵폐기물이다.
일본정부는 1950년대에 원자력 발전을 도입할 때부터 ‘재처리-고속증식로’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원전에서 한번 사용한 연료(이하 ‘사용후 핵연료’로 표기) 속에서 플루트늄을 추출해(재처리), 그것을 고속증식로 연료로 재활용하는 정책이다. 고속증식로는 플루트늄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늘리기 때문에 원료가 고갈될 염려가 없으며, 따라서 성공하면 우리늄을 3000년간 에너지원으로 이용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원전의 연료인 우라늄은 석유, 가스 등과 마찬가지로 한정된 에너지원으로 앞으로 약 80년이면 고갈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당시 세계가 ‘핵의 평화이용’에 달려든 것은 머지않아 고속증식로가 실용화돼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에 석유 수입을 금지 당한 경험(2차대전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이 있는 일본에게 에너지 확보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1970년대의 두차례에 걸친 오일 쇼크는 이 노선의 중요성을 확신케 했다.
1991년, 실험용 고속증식로 몬주(文殊)가 완공되지만 1995년에 사고를 일으켜 15년간 가동이 중단됐다. 2010년 5월에 가동이 재개되나 8월에 다시 사고를 일으켜 현재도 가동 중단 상태이다. 정지 상태에서도 하루 유지비가 5500만엔 드는,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1950년대에 전문가들은 1980년대가 되면 고속증식로가 실현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현재는 대부분의 원전 소유국이 고속증식로 노선을 포기한 상태이다. 일본은 아직 정식으로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2050년 실용화라는 막연한 목표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1950년대에는 30년 후였던 것이 현재는 40년 후로, 실용화 예측이 오히려 멀어진 상태이다. 전력회사들은 고속증식로 실용화에 큰 기대는 안하고 있다고 한다.
고속증식로가 생기면 핵 폐기물이 생기지 않는 ‘핵연료 사이클’이 완성된다는 것이 일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고속증식로가 실패하면서 ‘사용후 핵연료’를 처리할 방법이 없어졌다.
핵연료 사이클이 진전되지 않으면 사용후 핵연료가 원전 시설 내에 점점 쌓이게 된다. 만약 재처리를 안하고 그대로 땅 속에 묻는다 해도 최종처분장을 확보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진전없는 핵연료 사이클 유지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전력회사・경제산업성 내부에서 비판이 있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비판은 묵살됐다.[12]
일본은 이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후 핵연료’와 보통 핵연료를 섞어, 일반 원전에서 태우는 MOX라는 연료를 만들었다. 이 기술은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어 ‘사용후 핵연료’를 줄이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여겨지고 있는 반면, 위험성은 더 높아진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4호기는 지진 당시 원자로가 비어 있었는데도 수소 폭발이 일어났는데, 이 MOX ‘사용후 핵연료’가 수조 속에 저장돼 있었기 때문이다.[13]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원전들은 단계적으로 가동중단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일본에서 쓰이는 MOX 연료를 만들던 영국 공장이 문을 닫았다. 앞으로 MOX연료를 계속 사용할지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사용후 핵연료’는 플루트늄을 포함하고 있다. 즉 ‘사용후 핵연료’가 많이 쌓여있다는 것은 플루트늄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그 대부분을 현재 유럽 등 해외에 저장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전체량은 40톤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어, 핵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이란은 작년에 IAEA 이사회에서 “일본은 톤 단위로 플루트늄을 보유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북한은 최대 약 50kg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사용후 핵연료’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고속증식로 정책 포기를 선언하고 다른 나라처럼 ‘사용후 핵연료’를 영구 폐기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이 일본에서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영구 폐기하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우리나라도 그렇듯 ‘사용후 핵연료’를 처리할 고준위 핵폐기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핵폐기물을 처리할 방법도 마련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일본의 원전은 ‘화장실 없는 맨션’이라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 원전도 ‘화장실 없는 맨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고준위 핵폐기물은 최소 300년간 엄중 관리를 한 후에, 땅 속 깊은 곳에 저장해 1만년은 지나야 위험성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전은 짧게는 300년, 길게는 1만년 동안 조심스레 관리해야 하는 위험한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발전의 혜택은 지금 세대가 누리지만, 그 리스크와 관리 비용은 다음 세대가 떠맡아야 하는 것이 원자력 발전인 것이다.
4. 탈-원전은 가능할 것인가?
이번 사고를 겪은 후 일본에서는 원전에 기대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탈원전’이 전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원전 수는 54기로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제3위이다. 한편, 전체 전력 중 원자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28.9%로 한국의 34.8% 보다 낮다. 가장 높은 것은 76.2%인 리투아니아, 그 다음이 75.2%인 프랑스이다. 프랑스처럼 원전 의존도가 높으면 ‘탈원전’이라는 정책적 선택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으로 정책 선회를 한 나라가 두 곳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두 나라는 2차대전 패전국이다. 6월22일 도쿄 신주쿠에서 있었던 원전 반대 데모에서 사회학자인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게이오 대학 교수는 “2차대전의 승전국들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원전 개발에 힘을 기울여 오히려 핵에 의존하는 국가가 된 반면, 패전국들은 핵무기 보유가 금지돼 결과적으로 보다 손쉽게 탈원전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도 이제 원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원전 수는 많지만 의존율은 낮은 편인 또 하나의 패전국 일본에서도 탈원전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1) 원전정책에 반대해 왔던 전문가들
원폭 피해국인 만큼 일본 반핵 운동의 역사는 오래됐다. 원폭 투하 후 4개월 이내에만 약 20만 명이 죽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이 기억에 아직 생생했을 1954년, 미국의 비키니 수폭 실험 으로 다이고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라는 어선에 타고 있던 승무원 23명 전원이 피폭 당해 상당수가 그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으로 죽어갔고, 일본 내에서 전국적인 반핵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반핵 운동은 어디까지나 핵무기를 표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원전에 반대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핵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역사 때문인지 원전 건설은 대부분 원전 반대 세력과의 갈등을 동반했다. 그리고, 이번 지진은 반대 세력의 이의제기가 사회적으로 유효했고, 원전 안전성 확보에 큰 기여를 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했다. 후쿠시마 원전은 설계 시 상정하고 있었던 쓰나미보다 높은 쓰나미가 덮쳐 물에 잠기고 말았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보다 진원지에 더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오나가와(女川) 원전은 해발 15m 높이에 건설돼 다행히 쓰나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원래 오나가와 원전도 보다 낮은 곳에 건설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역민들과 원전에 반대하는 학자 및 운동가들의 오랜 싸움을 통해 현재 높이에 건설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비록 그들이 원했던 원전 건설 무효화를 이루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싸움은 또 하나의 후쿠시마 사태를 막아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지진 때 오나가와 1호기 또한 외부 전원을 상실해,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통해 냉각을 실시했다. 쓰나미가 들이 닥쳤다면 후쿠시마처럼 비상용 디젤 발전기도 무용지물이 됐을 것이고, 그 다음에 벌어지게 될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일본에는 예전부터 꾸준히 원전에 반대해 왔던 과학자, 언론인들이 상당수 있는데 선구적인 학자로 방사선 방호학을 전공한 한편 평화학의 권위자이기도 한 안자이 이쿠로(安斎育郎)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명예교수가 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오나가와 원전 반대 운동에 참가했던 과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출간한 저서에서 그는 원자력 분야 연구자이면서 원전정책에 반대하던 자신이 겪었던 고초를 논하면서도, 자신들의 힘이 부족해 이번 사태를 막지 못했다며 사죄하고 있다.
1970년대는 일본정부가 전력회사와 손잡고 비판을 억압하면서 원전건설을 강력히 추진하던 시기였다. 당시 지역 주민・변호사와 연대해 원전정책 비판활동을 해왔던 나는 반체제적 이데올로그로 취급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도쿄대 의학부 조수시대에 미행・차별・냉대・위협・협박 등에 시달려야 했다. (중략) 비록 원전정책을 비판해 오기는 했으나 반세기 가까이 원자력 분야에서 일해왔던 과학자로서, 결과적으로 이러한 위기적 사태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지역 주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다. 이것은 결국 전쟁을 막지 못해 괴로워하던 지식인들과 같은 심정일지도 모르겠다.[14]
하지만, 그를 비롯한 원전정책에 비판적인 많은 과학자 및 지식인들 덕택에 정부 발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컨드 오피니언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계속해서 번복되는 정부와 전력회사의 발표, 매스컴에 나와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원자력 마을’ 전문가들의 해설만으로는 불안이 가시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했는데, 이때 이들의 의견은 귀중한 참고가 되었다. 정보의 신속성과 다양성, 그리고 깊이에 있어서까지 인터넷은 다른 매체를 압도했는데, 그러한 인터넷의 정보들은 꾸준히 원전정책을 비판해 왔던 사람들이 발신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첫번째 원전이 폭발한 3월12일, TV에서 정부의 수소 폭발 발표를 중계했지만 TV의 설명만으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필요한 정보는 이것이 어느 정도로 위험한 것이고, 어디까지 대비해야 하는지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인데 그런 정보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 기자나 아나운서도 전문 지식이 부족했을 것이다. 한편, 정부가 폭발이 있었다고 발표한지 3시간 만에 인터넷에서는 전 도시바 원전 설계자이자 원전정책 비판자인 고토 마사시(後藤政志) 박사가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폭발 메커니즘과 앞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평소에 원전의 완전한 폐기를 주장해 왔던 교토대학 원자로 실험소의 원자력 공학 연구자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조수도 전문가 입장에서 일찍부터 멜트다운 가능성과 주변 주민 내부 피폭의 위험성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50세가 넘은 그가 아직도 ‘조수’지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원자력 공학 학계의 차별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르노빌 사태로 생겨난 방사선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쓴 바 있는 고다마 다쓰히코(児玉龍彦) 도쿄대 교수 등의 의견도 정부나 매스컴의 정보를 비판적으로 곱씹어 보고 그 신빙성을 판단하는데 유효한 잣대가 되고 있다. 그는 7월27일, 참고인 자격으로 국회에서 주어진 발언 기회를 통해 후쿠시마 원전 근처의 세밀한 방사선 측정과 오염제거 작업을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정쟁만 일삼고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격하게 질타했다. 고다마 교수는 연구팀과 함께 후쿠시마현 내에서 측정 및 오염제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지금의 상황에 걸맞는 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활동은 위법인 게 현실이라며 아이들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이처럼 그 동안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사회적 축적이 이번 사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15]
물론,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하루키, 사카모토 류이치, 가라타니 고진, 미야다이 신지 등 많은 문화인과 지식인들이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탈원전’을 호소해 여론 확산에 기여하고 있지만, 최종적인 설득의 근거는 원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원전정책 비판자들의 지식에 있다. 그리고, 이들의 지식을 토대로 ‘탈원전’으로 정책 전환을 실현하기 위한 밑그림이 그려지고, 여기에 손정의 회장과 같은 혁신적 경제인도 동조하면서 전면적인 에너지 정책의 전환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2) 정책 전환의 발목을 잡는 정치적 혼란과 ‘원자력 마을’
일본의 여론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6월 19일자 주고쿠(中国) 신문에 따르면 ‘앞으로 원전은 폐쇄해야 한다’가 82%에 이르러 ‘현상유지’라고 답한 14%를 훨씬 웃돌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민의가 반영돼 탈원전으로 정책 전환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이유 등으로 당분간 일본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호전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여당인 민주당과 제1야당인 자민당 모두 원자력 에너지 이용을 추진해 왔던 정당이다. 간 총리가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곧 사임하겠다고 밝힌 총리인데다 지지율이 너무 낮아(7월11일에 NHK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15%), 그가 정책 전환을 실현해 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6월2일 중의원에서 이뤄진 총리 해임안의 결과도 막바지까지 한치 앞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그가 사임한 후에 정국이 어떻게 돌아갈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만약 정치권에서 단기간 내에 강력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탈원전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 움직이지 않으면 관료들을 비롯한 ‘원자력 마을’이 현 정책을 약간만 손보는 정도의 변화만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지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탈원전 세력이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송전과 발전의 분리이다. 일본에는 9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모두가 지역별 독점 회사이다. 즉, 9개 지역에 전력회사가 하나씩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전력회사는 전기를 유통하는 송전 기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고, 발전 기능 또한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으며, 전기요금도 획일화돼 있어, 소비자들의 선택권은 극히 제한적이다. 기술력이 향상되면서 태양 에너지나 풍력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 효율성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일본에서도 이를 통한 발전을 추진하려는 지자체나 기업이 늘고 있다. 그런데, 전력회사가 송전 기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전력회사의 승인을 받은 업체만 자신들이 발전한 전기를 판매할 수 있다. 물론, 전력회사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인허가를 결정한다. 송전 기능이 일본 전력회사의 독점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송전 기능을 공영화한다면 전력회사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보다 자유로운 발전사업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이며, 발전 회사가 늘어나면 소비자들의 선택폭도 늘어나게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시장 참여 장벽이 낮아지면서 태양 에너지나 풍력 에너지를 이용한 소규모 발전이 전체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시장경쟁에 노출된 기존 전력회사는 비용과 효과를 합리적으로 계산해 경영판단을 하게 됨으로써 원자력 발전과 같은 비경제적인 발전 형태는 자연도태할 것이라는 점이다.
원전의 발전 비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발전 비용에는 국가의 세금으로 충당되는 연구개발비나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비용은 제대로 가산돼 있지 않다. 하긴 인류의 역사가 5천년 밖에 안됐는데 짧으면 300년, 길면 1만년 걸리는 관리 비용을 어떻게 현시점에서 제대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는 일방적으로 다음 세대한테 떠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원전은 초기 투자 비용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일반 기업 입장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너무 많이 노출돼 있는 기술이며, 이번 사고로 원전의 보험 비용마저 급상승해, 원전은 시장논리로도 긍정하기 어려운 발전 기술이 되고 말았다. 국책 추진이라는 뒷받침이 없다면 기업이 다른 발전 기술을 제쳐두고 원전을 선택할 만한 메리트는 별로 없다는 게 탈원전 측의 주장이며, 이를 위한 첫번째 목표가 송전과 발전의 분리인 것이다.
하지만, ‘원자력 마을’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 마을’을 비롯한 원전 이해관계자들은 이 흐름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자력 발전과 운명을 함께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민당의 고노 타로(河野太郎) 의원의 말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에 원전정책을 추진해 왔던 경제산업성 내부에서 원전정책에 회의적이던 일부 관료들이 송전과 발전의 분리 및 에너지 정책의 전환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이들을 모두 축출해 버렸다고 한다.[16] 그렇다면, 현 경제산업성은 그때보다도 원전추진파들이 많다고 봐야할 것이다.
일본은 관료 중심의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이 탄생한 1955년 이후 50년 이상 자민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다. 시간이 갈 수록 정치인들의 정책 입안 기능을 실질적으로는 관료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관료들이 그려놓은 밑그림에 도장만 찍는 정치인들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관료들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관료란 원래 주어진 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기능 집단이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기존 정책을 옹호하는 성향이 강하다.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관료가 정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래서 민주당은 탈관료를 의미하는 ‘정치 주도’를 내세워 정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관료들의 저항과 정치력 미숙으로 개혁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고, 민주당의 지지도는 자민당보다 낮아졌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관료들에게 정책이 내맡겨진다면 탈원전 정책으로의 방향 전환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거센 탈원전의 요구와 필사적인 ‘원자력 마을’의 저항 — 일본은 큰 갈림길 앞에 서 있다.
5. 후쿠시마가 요구하는 역사적 상상력
아날학파의 역사학자 페르낭 블로델은 역사를 서로 다른 세가지 시간층의 중첩으로 설명했다. 지리와 같은 자연 환경의 변화가 속하는 시간층인 ‘장기 지속’, 시장의 형성 및 재생산과 그에 따른 경제적 순환 구조가 만들어 내는 시간층인 ‘중기 지속’, 그리고 정치・사회적 이슈나 대립이 속하는 시간층인 ‘단기 지속’. 이 세가지 시간층의 중층결정이 역사를 구성하며, 그 중 가장 역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장기 지속’이라고 블로델은 말한 바 있다.
3월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은 장기 지속의 파괴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리먼 쇼크에서 조금씩 회복할 조짐을 보이던 일본 경제는 적어도 단기간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지진 이후 발표된 2월 실업율은 완만한 하락세를 지지하는 수치였지만, 지진과 쓰나미로 무너져 내린 공장들, 휩쓸려간 어선들, 일본 각지로 흩어진 재해민들만 고려해도 실업률의 급등은 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이번 지진은 고도의 효율성과 상호의존이 가져온 잠재적 부작용을 실감케 했다. 밀접한 정보교환을 통해 재고 유지 비용을 최소화하는 효율적 물류 시스템을 구축해 온 일본 자동차 산업은 지진 피해 지역에 있는 부품 공장이 가동을 중단함과 동시에 산업 전체가 마비되는 상황에 처했다. 재해 지역 뿐만 아니라 상호의존도가 높은 다른 업체의 노동자들 또한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이는 비단 자동차 산업 만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일본에서만의 현상도 아니다. 미국 공장까지 조업이 중단됐었으니까.
이것이 대지진이 가져온 중기 지속(경제)에 대한 파괴력이라면, 단기 지속에 속해 있던 다양한 정치・사회적 문제들 또한 쓰나미와 동시에 한순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지진 직전에 외무장관을 사임케 만든 ‘외국인’ 정치헌금 문제를 일본의 일부 세력은 보다 이슈화 해서 총리까지 겨냥하려 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런 ‘아무 것도 아닌’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일본 검찰의 폐쇄성과 권위주의적 태도를 개혁하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 같았던 검찰의 증거 조작 혐의에 대한 사회적 관심 또한 지진 문제에 묻혀, 검찰은 조용히 지층 아래 이 문제가 묻히기를 바라는 눈치다. 지진은 직전의 사회적 이슈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부차적인 것이었는지 일본 사회 스스로 자각케 했으며, 이 급격한 단절이 바로 현재 일본 사회 구성원들이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지진 직전이 아주 먼 옛날 같다”는 기묘한 시간 감각의 실체이다. 천년 단위로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는 일본 사회가 인공적으로 구축해 왔던 경제적・사회적 사이클을 한순간에 무너뜨려, 역사 자체에 커다란 단층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태 앞에서 블로델의 역사관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체르노빌 사태 때 이미 깨달았어야 했다. 체르노빌 사태로 큰 피해를 입은 벨라루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