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기자 mailto@vop.co.kr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선일보를 위하여!”

김영삼 전 대통령의 건배사에 수 백 명이 와인잔을 치켜들었다. 다들 무엇이 그리 기쁜지 서로 악수하며 즐거운 분위기다. 조선일보 90주년 기념식. 그 자리에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다.

5일 저녁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회 저명인사들이 즐비했다. 이른바 한국사회 ‘주류’들은 다 모였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모여 환담을 나누는 ‘주류’들 틈바구니에 서 있는 노 대표. 그는 왜 그 자리에 갔을까.

언뜻 생각하면 이런 의문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잔치한다고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게 무슨 문제일까.



“조선일보와 개는 출입금지”

문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다. 노회찬 대표가 대표 자리에 있는 정당의 이름에 ‘진보’라는 단어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조선일보.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는 한국사회에서 진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역사적 맥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안다.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치고 조선일보에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주말에 조합원 교육을 하고 다음 주에 멀쩡히 출근했는데 느닷없이 ‘주체사상 교육’을 했다는 황당한 기사를 맞이했던 공무원노조는 요즘도 조선일보에 연일 두들겨 맞는다. 사실 그 기사는 ‘오보’로 판명이 났었다. 조선일보의 전교조 관련 보도는 언론이 어느 정도까지 잔인해 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게 한다.

‘이 가뭄에 왠 파업’이라는 조선일보가 만들어 낸 희대의 역작은 요새도 심심치 않게 보수언론에서 쓰이는 논리다. 그 결정판이 ‘촛불시위=경제파탄’이다.

“조선일보와 개는 출입금지”

웬만한 진보단체 입구에 붙어있는 문구다. 이 문구가 등장했을 때 누구도 어색해 하지 않았다. 그 만큼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조선일보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하다.

촛불시위에서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취재하는 현장이 발견돼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 위협을 받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른바 ‘골수’ 진보단체 활동가가 아니어도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한다.

저 문구가 강력한 유행을 탔던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언론개혁 운동이 조선일보 절독 운동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당시 노회찬 대표는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었는데, 모든 당직자들이 조선일보에 응대도 하지 않았다. 당 방침이었다. 오죽하면 조선일보 기자가 ‘학맥’을 동원해 대변인에게 접근했을까. 당시 대변인이 서울대 출신이었는데 조선일보 기자는 ‘선배’라고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대변인은 ‘취재라면 아무 말도 못한다’는 입장을 반복했다고 한다.

노회찬, “나는 30년 조선일보 독자...품질 괜찮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노회찬 대표는 당시 놀라운 행동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2004년 국회의원 당선 직후 노 대표가 조선일보 노동조합이 주최한 ‘나와 조선일보’라는 강연에 나선 것이다. 그는 그날 강연에서 “나는 중학교 때부터 조선일보를 봐 온 ‘30년 독자’”라는 말부터 “품질에 있어서도 제일 낫다는 생각에서 조선일보를 보고 있다”고 말해 각계의 따가운 비난에 직면했었다.

이번 기념식 참석에 대해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은 “초청장이 왔는데 안가는 것도 그래서 참석했다”며 “고민은 됐었지만 대표의 판단이다”라고 전했다. 그는 “싸울 때 싸우더라도 생일잔치라고 초청하는 데 안가겠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느냐”면서 “좀 쿨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양문석 언론개혁연대 사무총장은 “언론개혁 진영이 조선일보를 범죄집단으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에서 (조선일보를) 자꾸 언론으로 착각하는 판단미스들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조선일보는 자기가 부르면 야당 대표들이 온다는 오만함을 가지게 되고 그런 자만심으로 야당을 조지고 있다”면서 “야당이 조선일보를 범죄집단 찌라시라고 못하고 언론으로 인정해 주면서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와 ‘좋은관계’ 맺고 싶다던 노회찬 대표

김종철 대변인은 “노 대표가 조선일보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노 대표의 이 같은 인식은 예전에도 엿보였다. 그는 2004년 조선일보 강연 당시 “이제 쌍방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사가 많아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른바 ‘운동권’에 대해서는 극심한 독설을 퍼붓는다. ‘팩트’가 잘 틀리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운동권’ 보도에서는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그런 측면에서 노 대표는 조선일보와 ‘좋은 관계’를 맺을 준비가 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 대표는 그날 강연에서 “민주노동당은 이제 운동권에서 탈피했으며, 민주노동당은 운동권에서 멀어질수록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노 대표는 민주노동당에서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당을 뛰쳐나가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신문이 조선일보다.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벌어진 이른바 ‘종북주의’ 논란은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의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진보진영의 대표적 이론가로 꼽혔던 주 전 정책위의장이 조선일보와 인터뷰 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충격이었지만 그 내용이 조선일보의 줄기찬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어서 세간의 충격은 더욱 컸다.

지금 노 대표는 민주노동당에 없지만, 확실히 조선일보에서 민주노동당 보도는 늘었다. ‘종북주의’ 두들기기 태풍이 지나간지 2년만에 ‘전교조+공무원노조+민주노동당’ 관련한 “악의적 보도”는 연일 조선일보의 지면을 장식했다. 민주노동당은 조선일보를 고소하는데 이르렀다.

이날 노회찬 대표의 조선일보 기념식 참석을 수행한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은 “싸울 때 싸우더라도 생일잔치에 초청하는데 안 가겠다고 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것이 노 대표의 생각이라면, 궁금해진다.

노회찬 대표는 삼성 이건희 전 명예회장 생일잔치에 초청하면 그 자리에도 참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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