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원희망신문에서 주관하는 선거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야권연대와 지역정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주노총의 추천(?)으로 발제자와 토론자로 참여했습니다.
야권연대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 마디로 권력(국회의원 의석)을 위해서 추악한 거래를 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입 아프게 주장하던 것도 슬쩍 감추고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서 합의를 했다는 것을 '추악한 거래'라는 말 말고 도대체 뭐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인터넷에서 난리입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용서가 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렇게 권력이 좋을까요? 물론 좋습니다. 그 권력을 누려 본 사람들은 알지요. 자신이 권력만 잡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잡기 전까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거나 입장을 번복하거나 하는 숭악한 종파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걸 진보라고 불러줘야 할까요? 한 마디로 대중에게 사기치는 거지요.
이렇게 된 원인은 단순하게 진보정당(?)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민주노총이 만든 민주노동당이라고 우기니까 말 하자면 노동운동이 썩었기 때문에, 썩은 관료들이 정치적 욕심을 내는 자리로 올라가는, 민주주의라고는 눈씻고 찾아봐야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노동자의 계급정치를 실현하는 것은 계급적 노동운동을 새롭게 건설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 썩은 물에 사람 몇 명 바꾼다고 청정 1급수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반성이 없네요. 잘 하겠다는 말은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아직도 입고 있으면서, 벗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잘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그 말에 진정성이 없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투쟁을 말합니다. 정당정치를 하는 사람이던,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사람이던, 사회주의정당을 주장하는 사람이던. 그런데 정작 투쟁의 현장에는 없거나 투쟁을 스스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이율배반은 뭔가요? 모두 자신의 이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운동의 혁신이란 건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관료들이 판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정치와 노동정치가 두 개의 뿌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두 개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정치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시민사회진영은 생활정치를 주장하면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눈감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진영은 시민사회진영의 몰계급성을 비판하지만 오히려 '생존권'이라는 영역에 -조합주의- 갇혀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된 것 아닌가요? 그리고 정치를 정당정치로만 보는 의회주의적 시각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지요.
실현가능성을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본가계급이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 체제에서 도대체 실현가능한 것이라는 게 뭐가 있습니까? 방법은 있지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권력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럼 작은 떡고물이라는 실현가능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통진당과 민주당의 야권연대가 그런 것이지요. 물론 지난 지방선거에서 문순씨를 지지하기 위해서 평소 자신들의 주장을 슬그머니 빼먹고 모른 척 했던 공동지방정부와 시민사회진영의 지지선언도 그랬지요. 그래서 뭐 세상이 좀 바뀌기는 했나요?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실현가능성을 높이자면 권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걸 낮은 단계의 진일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그건 샛길로 빠지는 겁니다. 돌고 돌아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겁니다.
실현가능성이라는 건 대중의 고통을 볼모로 야합하는 겁니다.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으려면 협조하라. 현대자동차비정규직투쟁에서 진보정당들의 만행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통진당의 야권연대를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지역정치를 말합니다. 지금 서울광장을 봅시다. 진보정당과 그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서 힘깨나 썻다는 사람들이 몽땅 모여서 박원순의 '시민정치'가 승리했습니다. 시민정치가 노동자들을 내치는 것, 강원도에서 지방공동정부로 등장한 최문순씨가 골프장과 핵발전소, 설악산 케이블카와 동계올림픽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시민정치'는 살만한 사람들만의 승리였을 뿐입니다.87년체제라고 말하는 동지들이 있더군요. 그래요 그렇지만 87년체제는 87년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노동이 배제된 87년 체제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체성이 모호했던 세력들이 그들의 품으로 더 날아갔을 뿐입니다. "마이 묵었다 아니가 이제 고마해라.'할 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아직 그러고 싶다면 그리로 건너 가세요. 이곳은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세요.
물론 노동운동도 조합주의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운동의 위기라고 말하는데 사실 운동의 위기가 아니라 관료들의 위기일 뿐입니다. 대중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데 준비가 안된건 대중이 아니라 관료, 당신이 준비가 안된거 아닙니까? 당신이 투쟁앞에서 떨고 있는데 얼굴 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렇게 거짓말하면 안됩니다. 간부들이, 활동가들이 투쟁하면 대중은 같이 합니다. 그 투쟁이 현실적으로 승리하지 못한다는 알면서도 대중은 함께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진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린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과거와 철저하게 단절해야 하고,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그리고 투쟁을 조직해야 합니다. 슬쩍 한 발 담그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방어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만들어 갑시다. 운동은 대중의 고통이 있는 모든 곳에서 싸움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급적 관점은 분명히 해야겠지요. 어느 투쟁이나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이라는 것이 진실입니다. 자본주의적 소유를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그 과정은 물론 고통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우리 스스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서로 위로하면서 함께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