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이 시려서 잠을 깼다. 전기장판은 뜨끈했지만 천막안 공기는 전혀 데워지지 않았고 몸은 한여름이었지만 얼굴은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는 듯 했다. 새벽 4시. 아내를 깨웠다. 함께 밤을 지새우는 설희씨도, 아내도 얼굴이 시렸는지 옷가지들을 얼굴에 덮고 자고 있었다. 나만 요령 없이 얼굴을 내밀고 자다가 먼저 잠이 깬 거였다. 아내는 일어나 정신을 깨려고 옆에 있던 생수통에 든 물을 무의식중에 마시다 깜짝 놀란 표정이다. 생수통의 물이 얼어서 얼음 알갱이들이 얼어 있었던 것인데 모르고 그냥 마셔버린 것이다. “ 영하 20도는 된 줄 알았네. 무슨 액체 질소라도 마신 줄 알고 깜짝 놀랐어. 냉장고에 있는 물도 그렇지는 않았는데.. ” 이번 달 난방비 4만원. 그래도 실내온도 18도는 넘는 집에 돌아와 아내가 하는 말이다.
한파 주의보가 내려진 날 밤. 강원 도청앞 골프장 반대 농성 천막에서 녹색당 당원들과 함께 텐트를 지켰다. 밤 11시가 넘어가서 네 분이 집으로 돌아가시고 아내와 나, 설희씨 셋이서 텐트에서 숙박을 했다. 얇은 비닐 포대를 뚫고 한겨울의 한기가 고스란히 텐트장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 한기에 잠을 설칠 때마다 ‘ 최문순 이 개새끼’ ‘골프장 이 거지 새끼들’ 그러면서 뒤척였다. 내리는 눈은 평등하다지만 이 한기는 아무에게도 공평하지 않았다. 골프장업자들, 그들과 결탁한 공무원들. 모두들 뜨신 방 안에서 잠 잘자고 있을 것이다. 그들 면상에 골프장 반대 텐트장에서 특별히 제조된 얼음물이라도 들이 부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밤들이 벌써 405일째. 이 방은 그래서 벌써 405호가 됐다. 아내와 나는 그 중 3일을 함께 했다. 골프장 전면 재검토해준다는 문재인 캠프의 말에 다음날 천막은 자진 철거됐다. 건설 중단도 아니고 재검토라는 그 세 마디 말을 듣기 위해 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1년이 넘는 날을 길바닥위에서 자고 법원에 끌려 다니고 가압류가 떨어지고 불면의 밤을 보내야했다는 것이 정말 기가 막혔다.
다음날. 병원은 연말에 밀린 건강검진을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나는, 마치 환자를 나르는 컨베이어벨트처럼 정신없이 진료를 했다. 밤잠을 설쳐서 컨디션은 엉망이고 환자는 넘쳐나고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어떤 환자분들을 본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다른 때 같으면 점심시간을 넘어서까지 계속되는 진료에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그날은 짜증낼 기운도 없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오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날. 나는, 내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세 분 중 두 분이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외롭다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성벽 앞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된 것 같은 무력감이 들었다. 그러다 새삼 도청의 밤이 다시 떠올랐다. 자정 즈음 화장실가려고 나오니 시내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도청의 위치 때문에 한밤의 춘천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그 불빛들은 유난히 더 따듯하게 느껴졌다. 춘천시 인구가 27만. 나머지 402일을 이 텐트 안에서 지샜던 분들은, 27만 인구의 405일간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얼어붙는 텐트 옆에 서서 저 아래 춘천 시내의 불빛들을 보면서, 그 불빛들의 침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 분들이 느꼈을 그 외로움과 절망감 앞에서 우린, 골프장 싸움이 잘 정리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난 그 분들에게 다른 불빛들을 보여드리고 싶다. 405일간의 농성 기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빛들을 모레 삼천동 체육회관에서는 보여드리고 싶다. 이렇게나 많은 불빛들이 실은, 여러분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내가,
당신이 그 불빛이다.
작성일 : 2012-12-2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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