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또 아래로

정태인(경제평론가)

1.

초겨울의 산하를 보며 쓸쓸하다고 느끼는 건 아마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탓일 게다. 그런 선입견만 버리면 차창 너머 우리의 누렇고 푸르른, 땅과 강은 안온하기만 하다. 강원도 농촌 지도자들께 강연하러 가는 길, 서울 근교 6번 국도는 마냥 아름답다.

나날이 여위어 가는 겨울 강을 노래한 사람이 안도현이었을까, 섬진강의 김용택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곽재구였을까. 아니 모두 다였을 것이다. 어찌 절창의 목소리들이 차오르는 시심을 억누를 수 있었을까. 팔당대교를 건너 두물머리로, 그리고 청평으로 이어지는 눈 내린 강은 그 옛적 추억과 함께 고즈넉하다.

아아. 다행이다. 북한강은 그 망할 한반도 대운하의 표적이 아니다. 그러나 잠깐, 양수리는 불어 오른 역류에 잠기지 않을까? 조안에서 춘천가도로 가는 이 가녀린 뚝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북한강이나 남한강이나 하류에 다다른 넉넉한 물길에도 지금 배 한척 없는데, 여기에 기어이 물을 채우겠다는 그 황당한 삽질 상상력에 진저리친다. 경제 때문에? 바로 그 경제를 평생 공부하고도 자연의 목줄을 죄는 저들의 욕망에 속수무책 밀리기만 하는 내 숨은 턱턱 막힌다.

2.

태평양을 건너고도 또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한 곳에 있는 월스트리트의 탐욕이 부른 경제위기, 아니 욕망은 끝없이 창조되고 또 채울 수 있다는 세이의 법칙("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이 기어이 불러온 위기가 이 땅을 덮치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시장만능의 교조를, 나아가 저 무덤 속 박정희의 성장 신화를 되살리겠다는 광신도들이 우리 아이들의 목숨마저 짓누르고 있다.

바다를 건너 튄 불똥은 우리 안의 폭탄에 옮겨 붙었다. 부동산과 자장면이 똑같다면서 분양원가 공개를 거부한 노무현 정권이 불러온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에 100조원이 넘는 돈이 들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짓기만 하면 돈벼락을 맞는다던 주상복합 건설 사업 등에 저축은행(12조 2천억원), 은행(47조 9천억원+매입약정 10조원), 그리고 제2금융권이 파악도 되지 않는 돈을 쏟아 부었다. 도처에 널린 황량한 겨울 공사장은 아무 상관도 없는 국민에게 곧 천문학적 공적 자금을 내라고 강요할 것이다. 아주 낙관적으로 20%만 망한다 해도 무려 20조원이 넘는다.

이 뿐이랴. KIKO라는 비대칭적 파생상품을 사기만 하면 널뛰는 환율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아니 나아가서 환차익을 거둘 수도 있다고 믿은 기업들은 환율이 1500원까지 치솟자 5-6조원의 손실을 입었다(정부 공식 발표로는 10월말 현재 3조 1874억원). 이 중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니 이들에게 전체 대출의 절반 가량(500조원 규모)을 빌려준 은행은 또 얼마나 부실채권에 시달려야 할까? 아주 낙관적으로 봐도 10조원 이상이 들어갈 것은 불문가지다.

일본의 값싼 엔을 빌려 와서 중국 펀드에 투자하면 이중으로 떼돈을 번다면서 들여온 이른바 엔캐리 자금이 무려 45억 달러(지금 환율로 치면 6조원 가량)로 추정된다. 엔화가 두배로 치솟은 반면 중국 펀드는 반토막이 났으니 이제 엔화를 돌려 줄 시점에는 생돈 9조원이 더 들어간다. 여기서는 또 얼마나 부실이 발생할까? 

헛된 욕망은 일반 국민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빚을 내서라도 집을 못사면 평생 이사만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리라는 초조함에 서민들까지 열심히 은행을 찾았고 위험한 기업대출보다는 안전한 고리대를 챙기자는 금융기관들은 그 욕망을 부추겼다. 한국은행의 9월 발표로도 가계 빚이 660조 3000여억원이고 이 중 부동산 대출을 약 30%로 치면 200조원 가량 될 것이다. 바야흐로 집값은 떨어지고 대규모 실업과 임금삭감이 닥칠텐데 제대로 원리금 상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0%가량 파산한다고 하면 20-30조원의 부실채권이 발생한다.

이미 집 앞의 식당들이 문을 닫고 있다. 중소기업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현금을 잔뜩 쌓아 놓은 대기업들도 내년 여름이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불똥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빨리 우리 안의 폭탄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도 불길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그냥 7% 성장이 되리라 호엄장담하던 대통령은 지금도 펀드를 살 때라는 황당한 처방만 내리고 있다. 달러 지급 보증을 하고, 원화를 풀고 금리까지 대폭 내려 봐도 자기 살 길을 찾는 데 급급한 금융기관들은 현금만 움켜 쥘 뿐이다.

'선제적'으로 불을 잡겠다면서 이 정부는 기름을 들이 붓고 있다. 투기로 문제가 된 경제를 투기로 살리겠다고 온갖 정책을 다 쏟아놓고 있다. 건설사가 무너지면 안되니 일단 돈부터 주고(대주단협약) 가뜩이나 텅빈 도로를 6조원어치 더 만들고, 그래도 그동안 거품을 막아 왔던 종부세를 폐지하는 한편, 바로 투기에 불이 붙도록 재건축규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분양권 전매까지 허용한단다. 그리고 기어이 강까지 뒤엎어서 주변에 리조트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작년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면 3년 내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했던 내 예언은 불행하게도 조기에, 더 큰 규모로 실현될 전망이다.

3. 

지금이라도 정신차려야 한다. 어차피 정신 나간 정부라면 이제 촛불이라도 나서서 이 위기를 최소화해야 한다. 적어도 50조원의 공적자금을 마련해서 부실을 도려내야 한다. 단 10년전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잘못을 고통분담이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국민이 떠 맡은 결과, 그들은 또 다시 돈 잔치를 벌였고 정확히 10년 만에 똑같은 상황을 맞았다.

투기를 불러 일으킨 15년 전의 공무원들이 장차관을 하고, 또 금융기관에 포진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또 다시 이 위기를 수습한다며 세금을 주무를 것이다. 금융기관의 경영진은 예외없이 갈아야 하고, 책임있는 국장급 이상 공무원은 퇴출해야 한다. 건설 자본은 이 참에 세계의 평균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국민의 돈이 들어간 금융기관은 자금중개와 안정된 금융시스템의 유지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국민이 통제해야 한다. 국제적 투자은행이라는 헛된 꿈을 지닌 경영자와 공무원은 모두 쫓아내야 한다.

부자들 감세를 철회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도로에 투자할 돈이라면 군단위에 병원을 만들어야 한다. 사교육을 폐지하고 등록금을 줄여서 30-40조원의 돈이 소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건강보험의 보장율을 80%까지 높여서 민간보험에 들어간 돈이 풀려나야 한다(약 5조원). 소규모 1가구 1주택의 가계 파산자의 집은 정부가 원가로 사들여야 한다.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 돈이라면 전국의 아름다운 숲과 오솔길을 늘리고 이을 수 있다. 고통분담한다며 공기업의 노동자 10%를 해고하는 이 정부의 아둔함을 노동조합이 따라 해서는 안된다.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고 비정규직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로지 아래로, 또 아래로 돈이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부자들이 이길 수 밖에 없는 게임에 스스로 뛰어 들면서(사교육, 부동산, 민간보험) 내 가족만은 살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 모두 살 길만 있지 나만 살 길은 없다. 

4.

겨울 하늘처럼 내려 앉았던 마음은 남이섬을 밟으면서 풀렸다. 아예 나미나라(NAMINARA)로 독립한 이 섬에는 예술가들의 손길이 곳곳에 스며 있다. 전국에 널려 있는 천편일률의 무슨 무슨 가든도, 파크도 없다. 버려진 병으로 꾸민 나무도 아름답고, 우리나라의 동화책 표지들을 확대한 전시도 눈길을 끈다.

남이섬 정도의 자연은 이 땅 어디에나 있다. 도로 만들고 강을 파헤칠 돈으로 믿을 수 있는 깨끗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재생에너지 사업을 벌이고 쓸만한 병원과 학교, 그리고 특색있고 에너지 절약적인 집들을 짓자. 예술가들이 지역으로 내려가서 남이섬처럼 정감있는 문화를 만들어낸다면 누가 귀향을 하지 않을까. 너무나 많은 영세자영업자들, 도시의 청년 실업자들, 그리고 은퇴한 어른들, 도시의 경쟁에 지친 중장년층까지 우리 모두의 고향으로 내려가기만 한다면 우리 경제와 생태의 문제는 어느 덧 풀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이제 숨쉴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래로, 또 아래로... 거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다.

작성일 : 2008-12-13 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