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여, ‘말랑말랑한 힘’ 발휘하라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라는 시구처럼 진보 진영 사람의 마음과 행동 양식에도 이러한 ‘번짐의 미학’이 필요하다.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   

     
지난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체제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진실이 은폐되었다. 재심을 통해 무죄가 내려졌던 여러 간첩 조작 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런데 ‘정파의 이익’ 또는 ‘조직의 대의’를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는 일은 진보운동 진영에서도 발생한다.

예를 들면, 지난해 ‘일심회’ 사건이 터졌을 때 민주노동당은 ‘일심회’ 조직원들이 국가보안법 ‘희생자’라는 이유로 징계를 거부했다. 국가보안법이 악법이긴 하지만, 당 내부 논의 내용과 주요 간부의 정보를 북한 당국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중대한 해당(害黨) 행위에 눈을 감는 것이 어떤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최근 민주노총 간부가 전교조 교사를 성폭력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조직이 공격받을 것이라며 성폭력 가해자의 형사 처벌을 방기했다. 이 외에도 전희경의 책 <오빠는 필요 없다>에 나오는 운동권 여성 중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을 들어보라.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조직이라는 ‘대(大)’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발상은 반인권·반여성 그 자체이다.

불리한 진실을 숨긴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그간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진보운동 진영의 고투를 인정하지만, 이같은 태도로는 결코 진정한 진보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최인훈의 오래된 소설 <서유기>의 구절을 인용해 말하자면,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문명 감각의 정상에 서서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 이것이 진보가 살길이다. 반면 “이 판국에 그런 언동을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진보가 죽는 길이다. ‘적’이 우리를 음해·공격하려 노리고 있기에 내부자의 중대 과오나 범죄를 묻어버리고 ‘단결’하자는 논리는 자기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진보는 불리한 진실도, 불편한 진실도 전부 드러내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한편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비웃음 섞인 말이 우리 사회를 돌아다닌 지 오래되었다. 진보 진영의 상당수는 과거 엄혹한 시기에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나 민중운동에 헌신했던 이들로, 논쟁을 하면 밤새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내공’을 갖고 있다. 이들은 다른 견해와 선을 긋고 각을 세우는 일에 익숙하며 또한 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에서 상대방의 선의와 문제의식을 살리기보다는, 모진 언사로 상대의 한계를 아프게 할퀴면서 자신의 올바름을 부각하려는 현상이 왕왕 발생한다.

현재 진보 진영에 대한 여론 지지율은 미약하다. 그 힘을 합해 퇴행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글 자본주의’와 싸우고 새로운 사회의 상을 제시하는 데 매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파, 무슨 파로 나뉘어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권력을 잡고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겠는가.

20여 년 전 민주화운동 내에서 운동가의 ‘품성’이 중요하다는 ‘품성론’이 잠시 등장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이 품성론 뒤에 ‘주체사상’을 민주화운동에 도입하려는 그룹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마뜩잖았다. 그렇다고 ‘품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나 망치 같은 파괴력만이 아니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중시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웃어넘기며 상대를 끌어안고, 자기 정파의 이익을 먼저 양보하는 포용력과 넉넉함을 보고 싶다. 함민복의 시 구절을 빌려 추가하면, “말랑말랑한 힘”을 발휘하는 진보도 보고 싶다.

얼마 전 근래 필자가 고민이 많아진 것을 눈치챈 벗이 장석남의 시 <수묵정원9―번짐>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마음속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시인이 의도한 맥락과는 다르겠지만, 여기서 인용하고 싶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진보 진영 사람의 마음과 행동 양식에는 이러한 ‘번짐’의 미학이 필요하다. 진보 역시 사람이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은 안팎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실망이 커진다고 하여, 그것이 바로 진보 진영의 입지 강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난폭 우향우 역주행’ 정책에 맞서는 동시에 자기 스스로 성찰에 박차를 가할 때이다.
 
 

작성일 : 2009-03-17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