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게시판을 보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지만, 이미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질 수 없는 이야기들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 논의들 속에서 발견된 흥미로운 점에 대해서 선거 이후라도 한 번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제 의견을 간단히 적어봅니다.

1. 똘레랑스와 혁명
홍세화 선생님의 '파리의 택시운전수'가 히트를 치던 시기에 저는 꽤 진지하게 맑스주의를 신봉하고, 혁명을 꿈꾸던 젊은이(지금도 젊지만...)였습니다. 똘레랑스를 이야기하던 홍세화 선생님의 책은 저에게, 그리고 제 친구들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하루는 친한 후배와 술을 먹으며 '똘레랑스'와 '혁명' 중 무엇이 더 중요하겠냐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모르겠다'였습니다. '적들의 심장에 피의 불벼락을 내리자...' '민중민주의 그날은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 이런 류의 노래를 즐겨부르던 우리에게 똘레랑스 - 관용의 가치는 우리가 하는 활동과 내용의 상당부분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와서 보면 똘레랑스는 프랑스와 서유럽이 겪었던 계급갈등과 혁명, 봉기, 전쟁 등의 상처가 누적되어, 관용적이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를 겪어야 했던 서유럽의 집단적 경험에 기반하여 형성된 집단적 성찰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끔 ‘유럽은 시민사회가 잘 발달되어 있나봐’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곳에서 조금 살아보니 의식이 높은 시민들이 많이 살아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결과나 효과를 두려워해서 서로에게서 한 걸음씩 뒤로 빠져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2.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종교를 가지고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늘 불편했던 것은 우리가 시위를 하거나, 캠페인을 벌일 때 사용하게 되던 일종의 (언어로나 물리적으로나) 폭력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역게시판 여러 댓글들에서 '이명박이나 최연희에게 너희가 비판할 수 있느냐'라는 내용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사실 우리가 간과해왔던 지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리적 폭력, 운동권의 권위적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내면화된 폭력, 외부로 향하는 폭력... 사실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신화된 국가, 자본 등에 대한 공격과 자연인으로서의 개인들에 대한 공격이 혼합되면서, 우리는 은연중에 폭력에 익숙해져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도당이나 중앙당, 아니 많은 웹사이트들을 보면서 늘 생각이 들었던 문제의식의 하나는 비난과 비판이 구별되지 않고, 까칠함과 진보적 사고가 구별되지 않고, 똑똑한 주장과 다른 사람에 대한 무배려가 구별되지 않으며, 누적된 지혜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즉흥적인 느낌에 의해 경시되고 희화되는 ‘이상한’ 문화였습니다.
저는 진보란 어떤 교리에 비추어 볼 때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끝까지 성찰하고 조심하면서, 그 결과로 도출된 옳은 것을 향해서 옳은 방법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도 몇몇 지점에 대해서는 느슨하게 생각하던 버릇이 있었습니다. 가령, 맑스레닌주의를 한 번쯤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정당한 폭력’의 개념 같은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것과 그것은 다르다’고 이야기하실지 모르지만, 솔직히 다르지 않지요. 저는 낙선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주장에서 도덕적 바람직함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에서 불편함을 느끼면서, 우리가 외부를 향해서 문제제기 할 때 저렇게 보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옮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해온 진보정당운동의 행적에 대해서도 다시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을까?
선거가 끝나면 많은 상처가 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과 권위주의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폭력에 반대하는 정당한 폭력에 대한 성찰, 우리 운동에서 배려와 성찰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 그리고 이러한 성찰을 전방위적으로 확장시키는 것… 저는 도덕주의가 정당의 중심가치에 오게 되면, 그 정당은 정치정당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들만이 함께할 수 있는 선지자 정당이 될테니까요 (볼셰비키가 그랬고 일본과 서유럽의 전공투가 그랬지요. 결국 선지자라고 스스로를 오해한 폭력으로 귀결되었지만…).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조심하기 위해서 늘 성찰하고, 배려하는 자세(그것이 내부를 향하건, 외부를 향하건)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도덕적 권위와 정치적 지지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성찰하는 진보’에 대해 재고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네요.
비판적 사고는 남을 비판하는 사고가 아니라, 스스로를 끝까지 성찰하고, 의심하고, 조심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로 나오는 입장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것이 될 것입니다. 물론, 귀찮고, 번거롭고, 성질에 맞지 않는 것이 되겠지만, 이번 논쟁이 시사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것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똘레랑스가 주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결국 상처에 대한 기억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화두를 던진지 15년만에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작성일 : 2009-03-25 0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