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내에 나갔다가 내가 살던 건물에 일이 있어 들렀다.
"정화조가 자꾸 넘처요."
"뭐가 막혔나 보죠?"
"다른 식당에서 우리 정화조에 몰래 버리기에 감시는 하고 있는데..."
"뚫어야지 별수 있습니까?"
"돈이 십 여만원 들텐데....."
뻔한 이야기였다. 자기 돈 들이기 싫으니 나를 부른 것이다. 마치 숨 넘어 가는 사람처럼 불러놓고 돈 타령이다. 그러나, 이 인간에게는 지기 싫다. 틀림없이 돈까스 많이 파느라 기름이 굳어서 막혔을테니 자신의 책임이고, 그러니 자신의 돈으로 뚫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전의 가게가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던 정화조였다.
게다가, 이 인간은 얄미워서 더욱 그렇다. 계약서 뻔히 써놓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노인네에게 찾아가서 월 30만원 짜리 계약서를 25만원으로 바꾼 약삭 빠른 인간이다.(십여년 전 부도를 낸 일이 있어 건물을 어머니 앞으로 해 놓았다.)
이인간 가게는 장사도 잘 된다. 동갑인 딸아이도 강릉여고에서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에도 가능하단다.(내 딸아이는, 지금 영화 공부 하고 싶다고 재수중이다. 딸아이가 고 3 때, 앞으로 뭘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하길래, 그럼 대학가지 말고 집에서 놀라고 했다. 그랬더니 고 3 때 부터 횟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돈 벌더니 어느 날 영화공부 한다고 서울 올라갔다.) 우리 건물은 농협에 1억 대출 받아 이자 갚느라 한 달 한달이 지옥 같다. 그리고 건물 세를 받아서 시골 노인네들에게 드린다.

사실 내가 건물주이지만, 그 인간 보다 연소득에서는 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건물주라는 신분 때문에 그 인간에게 괜히 죄를 짓고 사는 기분이다. 그 인간이 요구해서 들어주지 않으면, 괜히 착취한 기분도 든다. 진보 좌파라고 떠들어대는 놈이 건물주라니, 고개들기도 민망해진다.

양심을 빌어 말하자면, 세입자들 딱 한번 착취한 적이 있었다. 광우병 촛불 시위가 한창 일때, 광우병 반대 프랭카드를 만원씩 강매해서 각자의 가게 앞에 달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인간은 만원 밖에 안해서 그런지 선뜻 사주었고 제일 먼저 가게 앞에 내 걸었다.

그런 약점도 있기에 잠시 망서렸다.
"..........안됩니다. 당신 돈으로 뚫으시요!"
".........."
나는 일부러 강하게 내뱉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버렸다.
그러는 내 얼굴을 벌개졌고 다시 한번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역시 자본가는 할 수 없는 인간이야. 저 인간 틀림없이 세입자들끼리 모여 떠벌거야. 생각들은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나도 살아야 했다. 시골의 부모님도 계시고, 농협에 내 건물이 넘어 가기 전에 빨리 팔아 어렵게 사는 동생들도 조금 나누어 주고, 내 딸들 공부도 시켜야 했다.

작성일 : 2008-08-23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