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 상사와 팀원들, 국무회의

어느날 상사가 팀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여러분들의 어려운 일을 기탄없이 듣는 자리입니다. 나를 욕해도 좋고 회사에 대한 불만도 좋으니, 허심탄회한 이야기 합시다. 오늘 하는 말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자! 이 대리부터 시작하지! 고도리순으로…"

졸지에 첫 주자로 찍힌 이 대리는 안절부절, 몸둘 바를 모르고 얼렁뚱땅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넘어간다. 이어 고도리순이든, 역방향이든 순서대로 한마디씩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팀원들!

박 과장은 "특별히 할 말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순간 상사는 "참내! 장터를 만들어 줘도 놀지를 못해요"라는 질책만 이어진다. 과연 상사 앞에서 '상사를 욕하고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 있을까.

어느날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 자리. 이 나라를 이끄시는 장관급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모였다.

한 국무위원이 대뜸 "각하! 대선때 약속하셨던 재산 헌납을 이제는 실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감무쌍한 위원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날 국무회의 자리는 남극의 팽귄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얼음장 같은 순간이 됐으리라. 해당 국무위원은 최고 권력자에게 확실하게 '찍힌' 것은 물론이다.

* 정종오 기자, <'민증' 까고 까불기…'어.렵.다.'>(아이뉴스24, 2009. 4. 9.)에서 인용)

2. “떳떳하면 숨어서 얘기하지 말고 얼굴 들고 실명 밝히면서 얘기해.”

“떳떳하면 숨어서 얘기하지 말고, 얼굴 들고 실명 밝히면서 얘기해.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게 있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야? 왜 그렇게 사람이 용기가 없어?”

언뜻 보면 맞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얘기 꽤 들으면서 자랐지요.

떳떳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서 발언하는 경우가 많고,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 얼굴을 가리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얘기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떳떳한데도, 주위의 편견 때문에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ex.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 장애인, 소외지역 주민 등)

잘못한 건 없지만, 괜히 쑥스러워서, 혹은 자기 얼굴에 자신이 없어 얼굴을 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피곤할까봐 선글라스를 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얼굴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얼굴을 드러내면서 이상한 말이나 희한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보통 ‘뻔뻔한 사람’ 혹은 ‘멍청한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3. 현실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 그것으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00고등학교 2학년 3반에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지?” 학생들이 “저요!”, “저요!”하며 서로 손 들고 이야기할까요?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눈치 보고 가만히 있을 겁니다. 교장 선생님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권력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한 불만사항’을 A4용지에 한 쪽씩 적어(이름은 쓰지 말고) 제출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종이가 모자라게 될 것입니다.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가 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00연대’라는 사회단체에서 일을 합니다. 둘 다 실무자로 일을 합니다. 선배는 실장이고 후배는 팀장입니다. 선배가 상급자입니다. 그냥 학교 같이 다닐 때는 몰랐는데,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인간적으로는 친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불만들도 생깁니다. 불만을 표출해야 향후 둘의 관계도 더 좋아지고 조직도 더 발전할 수 있겠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선배가 후배를 불러 술을 한잔 합니다. “나는 너, 이런 게 문제라고 생각해. 이런 부분 좀 고쳤으면 좋겠어. 너도 나한테 얘기하고 싶은 것 있으면 얘기해 봐.” 아주 좋은 선후배 관계라면 후배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선배한테 충분히 표현하는 게 그리 쉬울까요? 표현을 하더라도 완곡하게 아주 조금만 얘기하게 되는 경향이 있겠지요. 물론 사회단체다 보니 선후배(상급자-하급자) 관계가 다른 직장에 비해서는 권위적이지 않겠지만, 그 둘의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권위적인 요소가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이 있다면 훨씬 더 표현하기 쉬울 것입니다.

4. 사회적 불평등과 편견, 그것으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보통 진보진영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이 그들의 권리를 위해 집회를 할 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성매매 여성이 그 직업에 종사하게 된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몸 파는 X’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많은 남성들이 성매매 여성을 멸시하거나 천대합니다. 사실, 진보진영의 상당수 남성들도 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성매매 여성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회를 할 때,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자기의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매매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쏟아져 나오는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입니다.

21세기에도 가부장적 문화가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 여기서 당당히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자가 어떻게 담배를 피우나?’, ‘(남자는 괜찮지만)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건 정말 나쁜 일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남성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한 여성이 ‘여자는 왜 담배 피우면 안 돼? 구린 남자들..’ 뭐 이런 주장의 글을 게시판에 실명으로 올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때부터 그 여성에 대한 온갖 비난들이 쏟아질 겁니다. 혹, 비난하지는 않더라도 ‘저 여자 담배 피우는구나. 좀 별로인데.’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우리 진보신당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여전히 우리 당내에도 ‘남성중심적/가부장적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호남지역 차별의 문제를 제기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국사회에서 계급문제, 여성문제, 학벌문제 못지않게 지역차별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연히도 그 사람의 고향이 호남입니다. 그 사람이 실명으로 호남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하면 어떤 댓글이 달릴까요? 아무리 합리적인 주장을 하더라도 ‘고향이 000니까 그런 거지.’ 이런 반응도 충분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반응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동성애자도,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5. ‘한 번 찍힌 사람’, 그들에게 표현의 자유는 무엇인가?

과거에 실수로 절도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다녀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출소 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전과자라고 해서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 취직은 포기하고 동네 구멍가게를 차렸습니다. 그 사람의 취미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익명으로 글 쓰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실제로 000이고, 전과자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조금씩 기피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요?

과거에 당내에서 ‘성폭력 2차 가해자’로 징계를 받았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기위원회의 징계에 따라 성폭력 예방 교육도 이수하고, 피해자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도 하여 피해자도 그를 용서했습니다. 자격정지 기간도 2년이 경과했습니다. 그 동안 자신을 반성하고 이제 새롭게 당 활동을 시작하려 합니다. 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는 건 어렵더라도 평당원으로 활동하며 가끔 자신의 목소리라도 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실명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자니 사람들의 시선이 걱정스럽습니다. 이럴 때 익명성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익명성은 전과자에게나, 과거 징계를 받았던 사람에게 있어서나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여전히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고 ‘낙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익명성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따지지 않고 ‘그 사람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따지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6. 내부고발자

최근 4대강 정비사업이 대운하 사업의 전초라고 양심적으로 고백했던 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가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몰상식한 사건입니다. 김이태 박사는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을 텐데, 양심적으로 용기 있게 행동한 그가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는 그런 용기 있는 행위가 ‘징계’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잘못된 사회적 관행을 철폐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사람들은 조직에 뭔가 잘못이 있더라도 “찍힐까봐” 발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특히 내부고발자를 조직의 배신자로 몰아가는 풍토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진보진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직 스스로가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어 치료하지 못하면 그 조직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을 것이며, ‘개혁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익명성’은 조직 내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7.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권리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상 낯을 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것 또한 자신의 권리입니다. 너무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이 많아서 평범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릴 때 화상을 입어 흉터가 남 보기 민망해서 얼굴을 가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저는 화상을 입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한 여성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 복면을 한 상태로 발생하는 범죄가 많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가 ‘누구나 다 가면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허용하는 문화’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범죄의 원인은 다른 데 있습니다. 물론 복면을 했기 때문에 더 쉽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면 착용 금지법’을 제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 또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익명성을 필요로 하는 당원들도 있을 것이고, 우리 조직은 이러한 당원들의 요구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핵심적인 조건이며, 조직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진보신당은 현실에서의 권력관계나 불평등, 편견, 낙인 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당이며, 앞으로도 그러한 노력들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성이 보장되어야 다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합니다. 자유로운 발언과 비판 속에서 조직은 한층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익명성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무기입니다.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말했는가’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아래로부터 자유로운 비판이 많아야 건강한 조직입니다.

작성일 : 2009-05-01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