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사건과 지난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 Ⅴ

무엇이 문제였는가? (3)

당규상의 공백을 이용한 무리한 출마

현행 당규(당규 제6호 선거관리규정)에 의하면, “선거일 현재 당기위원회로부터 당규 제3호 [당기위원회 규정]에 의한 자격정지 이상의 징계를 받고 그 처분이 확정된 후 1년이 경과한 자”라야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작년 5.3사건 당시에 당기위원회 규정과 선거관리규정이 갖추어져 있었다면 폭력사건으로 자격정지 처분을 받은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길00 씨는 당연히 후보에 출마할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후보 출마는 물론 투표권도 행사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당기위원회 규정과 선거관리규정은 작년 5.3사건이 발생한 뒤에 제정되었고, ‘소급적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출마가 가능했던 것뿐입니다. 사실상 법적 공백을 활용한 출마였으며, 형식적으로는 하자가 없을지 모르나 내용적(실질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출마였습니다.

지난 3월 1일 당대회 1차 회의에서 강원도당 소속의 김00 대의원이 당대회 의장단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거관리규정의 소급 적용이 가능하냐'는 질문이 있었고 이에 당대회 부의장 김00 변호사가 '법의 일반원칙상 소급 적용은 어렵다'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5.3사건 가해자였던 길00 씨 문제를 염두에 두고 질문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김00 씨는 이번 선거에서 길00 씨의 출마를 지지하면서 "길00의 사퇴를 주장하는 사람의 지지를 거부한다"라고까지 밝혔습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김00 씨의 당대회에서의 질문은 '길00 씨를 강원도당 위원장으로 세우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해석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습니다.

낙선운동그룹은 처음에 도의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현행 당규에 의거해 출마 자체가 절차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문제까지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당규의 소급적용’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해서 절차적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행 당규를 과거의 징계 처분에 적용하는 것이 형식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진보신당의 현행 당규는 ‘당원으로서 기본적 상식’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많은 당원들에게 쓸데없는 발목잡기로 비춰졌습니다.

강원도당 주요 당직자 및 활동가들의 비민주적 논의 구조

강원도당 제2창당위원회 회의 결과를 아무리 살펴봐도 진보신당 강원도당 초대 위원장 후보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한 흔적이 없습니다. 물론, ‘위원장 후보로 누구를 세울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출마를 결의한 사람이 후보등록기간에 등록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출마한 후보들이 많다면 당원들이 그들을 유심히 비교 관찰한 다음 누구를 찍을지 선택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인력난’을 겪고 있는 강원도당 상황을 고려했을 때, 즉 위원장 후보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조직적 위기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이고 적극적으로 후보를 발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주요 당직자를 비롯한 상당수 당원들은 길00 씨의 출마를 염두에 두고 비공식적으로 논의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강원도당 제2창당위원회에서 공식적인 논의라도 하셨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입니다. 공식적인 논의를 통해 그의 출마가 어떠한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점에서 필요한지를 논의했더라면 회의 결과 공지를 통해 더 많은 당원들의 의사를 수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헌/당규 체계를 갖추고 제2창당을 맞이하는 가슴벅찬 상황에서 강원도당 위원장 후보로 누가 출마할까 기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폭력사건의 가해자 한 명만이 단독 출마했을 때는 솔직히 난감한 심정이었습니다.

“가치중립적인 입장이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비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 중립성 논쟁

낙선운동을 진행하면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중립적인 입장, 또는 양비론이 가해자를 비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투표기간이 시작되던 날 올린 글(지역 커뮤니티 게시판 466번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어느 당원 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셨고, 이에 곧바로 해당 내용을 삭제했지만, 계속해서 논란이 증폭되었던 부분입니다.)

“우리는 가치중립적인 입장이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비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내면화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여과 없이 다 쏟아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한 설명 없이 이러한 표현을 하는 것은 아마추어리즘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삭제하는 이유를 아래와 같이 댓글로 밝혔습니다.

"가치중립적 입장이 가해자를 비호한다'는 입장은 이 사건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비춰지기 쉽다는 문제의식에서 작성되었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이기는 하지만, 현재 이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다는 판단이 듭니다. 선거 이후 시간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토론할 사안이라는 생각에서 표현을 삭제합니다.

‘폭력의 내면화’에 있어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 스스로도 예외가 아님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한 우리의 실수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표현에 있어 세심하지 못한 부분 신중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다시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우리가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못했지만, ‘중립적인 입장, 양비론적 입장이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비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우리의 주장은 지금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견해이며, 사실 다음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힘센 철수'와 '힘이 약한 차돌이'가 주먹 싸움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잘못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둘 다 똑같이 대하는 중립적인 심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과적으로 철수가 이기게 됩니다. 따라서 힘이 약한 차돌이를 돕는 것이 더 올바른 입장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또 다른 예로, 용산사태를 떠올려 봅시다. ①철거민들이 망루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폭력과 경찰의 폭력(공권력)이 있었고, 다른 한편 ②거세게 저항했던 철거민들의 ‘폭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쪽 다 폭력을 행사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원래의 좋은 의도와는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철거 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정치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현실 속에서 기득권 세력은 물리적/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강자인 반면, 투쟁했던 철거민들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아니 모든 폭력 사건 해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남성들은 '가해자 인권론'으로 맞서고 있다."

"모든 인간이 인권을 갖는다는 근대적 인권 개념의 보편주의는, 진보적인 동시에 문제적인 사유 방식이다. 보편적 인권 개념은 칼날과 칼자루와 같은 양면성을 지닌다. 인권 개념의 보편성은, "여자도 인간이다.", "동성애자도 인간이다." 등 사회적 약자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보편적 인권 개념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주장되고 있는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이나, '이성애자의 인권', '자본가의 인권', '백인의 인권'처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강자의 인권'일 경우에도 진보적 가치가 될 수 있을까?"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중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록 진보정당이라고 하더라도) 평등한 개인 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지만, 실제 현실은 경제적 계급, 성별, 지역, 학벌, 외모, 장애 여부, 성적 지향, 나이, 육체적 힘, 조직 내에서의 지위, 개인이 가진 인적 관계망 등에 따라 다양하고도 미세한 권력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진보정당도 예외는 아닙니다.)에는 여전히 뿌리 깊은 권위주의 문화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작년 5.3사건도 그러한 권력관계와 권위주의 문화 속에서 발생한 것이고 그 이후 사건의 처리 과정도 그러한 관계와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작년 5.3사건이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10개월간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사과도 없었고, 선거 출마 이후에야 사과가 이루어지면서 피해자가 가해자의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 상황이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한편, 길00 후보의 출마는 단지 개인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졌던 게 아니었습니다. 상당수의 당원들이 그의 출마를 적극 독려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폭력사건과 피해자의 상처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못했던 강원도당이, 그래서 피해자의 탈당을 방조했던 강원도당이, 그 사건이 지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가해자를 위원장으로 세우는 모습을 보고 솔직히 우리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관계를 무시한 채 인권의 보편성을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강원도당 내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가해자를 돕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강원도당은 ‘평등하고 건강한 조직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했는가?

작년 6월 23일, 강원도당 제2창당위원회는 당원들에게 아래와 같은 약속을 합니다. (공지사항 43번 글 “5월 3일 사건에 대한 강원도당 사과문” 참고)

“ 2. 평등하고 건강한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진보신당 강원도당은 조직체계의 강화와 안정을 위해 더욱 매진하여 당내 외 여러 현안과 문제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하고 입장을 표명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조직 문화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진보신당 강원도당은 위계의 관계가 아닌 수평의 관계, 폭력이 아닌 대화, 비난보다는 존중이 우선되는 진보적인 문화 풍토를 정착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을 당원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내부의 문화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런 약속이 단지 말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작동되어야 합니다. 작년 5.3사건 이후 50일이 지나 사과문 하나, 결정문 하나만 내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해자에게 애정이 있었다면 그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했는지도 계속 체크했어야 했고, 피해자가 다시 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위계의 관계가 아닌 수평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강의나 교육사업도 기획했어야 했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이런 일을 하는 진보적 단체나 개인들도 많습니다. (ex.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하는 인권감수성 교육, 비폭력대화 프로그램, 정희진 씨 등 여성주의 관련 강사들, 성 소수자 활동가 최현숙 씨, 장애여성 운동가 박김영희 부대표 등)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펼쳐 나가기 위한 조직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성일 : 2009-06-27 20:17